진주 남강가 의암바위에 대한 낭설 하나. 폭이 넓었다더라.
진주 남강에 얽힌 솔깃한 이야기 중 하나.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물속으로 뛰어든 의암바위가 있습니다. 한발 살짝 건너 뛸 수 있는 정도에 있는데요. 예전에는 제법 넓어 그 사이로 배가 지나다녔다고 정색하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바위가 움직였다는 거죠. 낭설이다 반박하면 1969년 남강댐이 생겨나면서 물의 높이가 달라져 그때는 달랐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뉴스 사실은 무엇일까요?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3만여 유리원판을 작년 12월 국립중앙박물관이 인터넷에 공개했습니다. 이 사진은 경남진주 남강 주교 원경(慶南 晋州 南江 舟橋 遠景)이라는 이름이 달려 있는데요. '주교'는 배다리를 말합니다. 물이 오른쪽으로 돌아가는데요. 그 오른쪽 사안은 모래밭이상당히 크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남강 이쪽입니다.
촉석루 아래 절벽과 그 끝머리 촉수를 내어민듯한 의암이 있습니다. 각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배가 지나다닐만한 공간은 아닌 듯 합니다. 백년전보다 지금 물살에 더 바위가 쓸려갔을테니 지금이 1mm라도 넓어졌다고 보아야겠죠.
금방 검색해보니 흥미로운 가설(?)이 있네요. 의암 바위가 모래밭위에 떠있어서라고 말이죠. 중앙일보 2008년 "진주 남강의 ‘의암 비밀’풀렸다"라는 기사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지질학자인 서승조(65·진주교대 과학교육과)교수가 최근 펴낸 ‘진주의 지질과 화석’(지식산업사, 134쪽)이라는 책에서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제1장 진주의 지질 경관-‘의암은 정말 움직이는가’라는 항목에서 촉석루 암반층 지층면 방향은 동쪽이 기울어져 있는데 의암은 수평이라고 밝혔다. 바위의 밑부분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바위라는 설명이다. 의암은 모래층위에 얹혀 있어 강물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움직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층으로 접근한 서승조 교수에 의하면, '의암은 촉석루쪽 바위와 서로 다른 바위로 모래층 위에 얹혀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게 '억지로라도' 가능하겠네요.
윗부분이 가로 3.6m, 세로 3m크기인 이 바위는 ‘나라에 큰일이 있을때 마다 촉석루쪽 암반과 붙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며 신비감이 돌고 있다. 6.25전쟁 때 촉석루쪽과 붙었다고 전해 온다. 그동안 의암의 이동설에 대해 소문만 무성했을뿐 아무도 과학적 접근을 시도해 보지 않았다.
서교수는 의암의 윗부분이 가로 3,6m이고 세로 3m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높이는 살짝 빼어 놓고 있습니다. 3차원의 바위는 높이가 있어야 전체 크기와 무게가 대강이라도 나올텐데요. 물이 빠졌을 때를 보면 높이는 대강 이정도입니다.
1966년 의암바위로 신혼여행을 떠난^^ 신혼부부의 사진입니다. 물밖에 드러난 높이가 1m는 족히 되겠는데요. 오른쪽에 '의암'이라고 각자가 새겨져 있는데, 물이 빠지면 아래로 또 몇십센티 더 드러납니다. 이 정도로 엄청난 체적의 바위가 모래밭을 콱 누르고 있는데, 과연 한여름 거센 강물이 과연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을까요.
기사에 ‘나라에 큰일이 있을때 마다 촉석루쪽 암반과 붙는데, 6.25전쟁 때 촉석루쪽과 붙었다 하는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라고 하고 있는데, 그들에 의하면 그 후 15년동안 이정도로 벌어진건 1959년 그 유명한 태풍 사라호 때문이겠죠.
의암이 '벌어졌다 붙었다'라고 보는 건 민중들이 전례 없는 변란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천지감응설을 들고 나온거라 봅니다. 하늘과 인간사는 분리되지 않았다는 고래의 뿌리깊은 사고방식중 하나이죠. 표충사의 비석이 꽃이 핀다느니, 눈물을 흘린다느니, 외국에도 성모 마리아상이 피눈물을 흘린다느니 하는 거 말이죠.
우리들 사이에 재미로 주고받을 이야기에 과학자가 뛰어들어 논리적으로 증명을 하는 판에 제가 더 강변할 수는 없고, 1950년대초 전국적인 각광을 받았든 개천예술제에 참가한 유명인사의 여행기를 발견하는데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때 그들이 의암바위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말이죠. '살짝 뛰어서 건넜다'고 한다면 낭설인 셈이죠.
둘째, 이것 또한 낭설인데요. 일제가 삼림을 남벌해서 숲이 헐벗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15년 당시 진주의 산들은 이미 큰 나무는 거의 없이 관목만으로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조선말에 이미 충분히 남벌되어 한양도성 조정의 근심꺼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