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삼각산은 개성의 앞산이었으니...

등산의 재구성|2020. 8. 18. 19:31

천동설을 주장하려면 많은 지점에서 궤변을 펼쳐야 한다. 반면 지동설은 말그대로 단순 담백하다. 북한산이 그러하다. 삼각산이 고려의 수도 개성의 앞산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수많은 수수께끼들이 풀린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제까지 그러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지엽과 말단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북한산은 한국의 산 중에 거의 유일하게 학(學)의 대상이다. 강단학계로 치자면 이숭녕 박사와 김윤우 선생님, 그리고 민경길 교수가 있고 강호무림에 재야고수들도 가득하다. 북한산학(學)을 하는 이들에게 이 세권은 필수 도서가 되겠는데, 의외로 이숭녕 박사가 박영사에서 펴낸 "산 좋아 산을 타니"를 모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아무튼 그들은 한결같이 '조선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많은 것을 밝혀냈지만, 동시에 적지 않은 데서 어그러진 예를 만난다. 아래는 '삼각산은 개성의 앞산'이라는 논지로 이를 하나하나 가볍게 언급해 보고자 한다. 

 

아쉬운 것은 이숭녕 박사의 책과 김윤우 선생님의 '북한산 역사지리"는 책장에서 찾아 다시 대강을 살폈지만 민경길 교수의 '북한산"은 찾지 못했다. 기억에 의존해도 그가 주장하는 대강 역시 다르지 않을거라 본다.

 

 

 

0) 강단학자이건, 강호무림의 고수이건 북한산에 관한 기본텍스트로 조선 후기 성능이 지은 "북한지"를 기본 텍스트로 본다. 그러나 이는 조선 후기에 씌여진 책일 뿐이다. 삼각산에는 조선중기 이전, 고려시대의 기록과 유물과 명칭들이 적지 않다.  

 

고려시대 이전의 명명은 고려시대의 관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 이를테면 인수봉은 과연 논어에서  흔히 말하듯 "인자수"라는 문구에서 비롯된 명칭일까?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불교국가인 고려시대때 지어진 허다한 명칭들에서 어찌 그 특별하게 생긴 봉우리에, 개성에서 독출한 그 봉우리에 논어구절이 들어갈 것인가.

 

불교식 명명법에서 찾자면, 인수봉은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고려때 있었다고 하는 사찰 '인수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인수사는 현재 어디인지 비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그 인수사의 흔적은 어디쯤일지 짐작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인수봉과 백운대에서 서쪽으로 펼쳐지는 하부계곡일 것이다. 백마부대 휴양소도 그 후보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사진은 북한의 명산을 소개하는 옛 책에서 모셔왔다. 천마산 인수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이다. 한눈에 보아도 인수봉 뒤쪽, 인수릿지를 닮았다.

 

개성에 가보아야 알겠지만, 이 사진이 확실하다면, 나는 북한산 인수봉이 개성 천마산 인수봉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본다. 개성에 가볼 때까지 잠정적이지만, 그것이 확인된다면, 남조선에서 오로지 등산박물관이 맞다.

 

1) 학자들은 한결같이 삼각산을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라고 푼다.

 

그러나 그들은 국영수 중심으로 대입공부를 한 수재들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책에서 본 것을 현장에서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를 삼각산으로 비정하려면 특별한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서울 사대문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우이동은 일제 식민지시절 벚꽃놀이터가 되기 전까지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못한 곳이니 배제하자. 서쪽에서 어찌어찌 특정의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조선사람들도 사실 마찬가지이다. 그들 역시 무심코, '종족의 우상'처럼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라고 인식한 듯 하다. 그러나 양반네들이 삼각산을 현장에서 확인했을 리는 거의 없다. 그냥 습관적으로 인식한 것일 뿐이다. 개성에서는 찍은 사진을 보자면 곧바로 가능하다. 의문을 품을 수다 없다.

 

2) 왜 고려때 백운대를 중봉이라고 했을까?

 

설악산의 중청과 지리산의 중봉은 최고봉인 대청봉과 천왕봉보다는 낮다 그래도 중봉이라고 한 이유는 아무래도 가운데 있어서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려때 백운대를 중봉이라고 한 까닭은 가운데에 있어서일거라 본다. 

 

조선 양반들의 북한산행로인 북한산성 쪽 또는 문수봉쪽에서 보자면 백운대는 중봉이 되지를 않는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서 보면 그 답이 곧바로 풀린다. 서울과 달리 또렷하게 평지에서 돌올한 삼각산의 세 봉우리를 인식하게 된다.그리고 백운대가 별 어려움 없이 그냥 간단히 중봉이 된다. 보시다시피!

 

왜 백운봉이라고 했을지도 명확해진다. 서울사람들에게 삼각산 최고봉은 흰구름'이라고 볼 건덕지가 없다. 그리나 불교를 믿었던 개성사람들에게는 50km 떨어진 북한산 최고봉이 아련하게 구름에 쌓여 있는 봉우리였을 것이다. 백운이 불교식 용어답게 북한산에는 수많은 사찰들이 있었다.

 

3) 북한산성에 있는 사찰이름이 왜 거듭할 중(重)을 쓴 중흥사이고, 중흥산성이라고 했을까라는 이름에 대한 관심이 덜한 듯 하다. 사람들은  대충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해 만들었다고 짐작할 거라 본다. 

 

나는 고려의 진산인 천마산에 있던 대흥사와 고려시대 비상시를 대비해서 만들었던 산성이었던 대흥산성에서 착안한 걸로 본다. 조선의 진산인 북한산에 다시 만든 비상시 산성이라는 뜻으로 본다.(물론 대흥사와 중흥사는 고려때 사찰이라, 그 선후는 더 조사해보아야 할 일)

 

 

4) 과연 만경대는 무슨 뜻일까? 이숭녕 박사는 따로 풀지 않고 있고, 김윤우 선생님처럼 '정상에 오르면 만가지 경치를 조망할 수 있어서 만경대 또는 망경대라고 했을까?

 

그는 설악산 만경대 등을 들면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진에서 보듯, 설악산 만경대 역시 봉우리 모양들이 '만가지 경치'를 연출해서이다. 조망하는 이가 봉우리 정상이 아니라 아래에 있다. 북한산 만경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성 천마봉의 주봉인 만경대를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본 모습이다. 역시 밑에서 볼때 봉우리가 뾰족뾰족 만가지 경치를 연출하고 있다.  그래서 만경대이다.

 

나아가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북한산 만경대가 고려시대때 붙여진 것이 아니라 조선때 붙여진 거라면, 이 이름은 천마산이 만경대에서 비롯한 걸로 본다. 고려의 유신들이 한양으로 강제적으로 이주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해 '같은' 이름을 붙였을 거라고 말이다. 미국에 이주한 유럽인들이 붙인 이름이 뉴(new)욕. 뉴(new)저지 하듯이 말이다.

 

 

만경대는 이렇게 서쪽에서 볼 때 제대로 만가지 가지가지 경치를 연출한다.

 

5) 국망봉이 과연 만경대의 다른 이름일까? 과연 무학대사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바라보아서일까?

 

억지로 보려 해도 만경대에서 서울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습관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김윤우 선생님이 말하듯, 고려때 이미 삼각산 봉우리 이름으로 '국망봉'이 등장한다고 한다.

그러니 무학대사와 국망봉을 연결 짓는 것은 민간설화일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만경대가 과연 국망봉일까를 의심해야 한다. 공식적으로 그 어떤 문서에도 국망봉과 만경대를 동일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언어의 유사성에 기초하여 주장하는 걸로 보인다.

 

다만 국망봉이라는 명칭에서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국(國)이라는 게 한양이 아니라 고려의 수도인 개성이라는 사실이다. 이건 단순하지만 확실한 사실이다. 지방인 한양으로 좌천(?)한 이들이 고려 '개성'을 바라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짐작으로는 국망봉이 백운봉이 되어야 할터인데, 백운봉이 이미 이름 있으니, 그 오른쪽으로 펼쳐진 봉우리를 국망봉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본다.

 

 

6) 다시 말하지만, 삼각산과 삼각산 안의 많은 명칭들은 고려때 지어졌다. 그들의 관점으로 보아야 오류가 적어질 것이다. 조선 유학이 아니라 북한과 친해야 한다. 다음에 다시 잡다한 이야기를 이어갈까 한다. 그 이야기들도 다 쉽다. 

 

 

 

 

'''''''''''''''''''''''''''''''''''''''''''''''''''''''''''''

 

주어진 답을 달달 익히는 것에 능하다고 칭찬받는 고등학교 시절 나를  청신(淸新)하게 해준 건 국사시간에 들은 한마디이다. 송시열 일당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임에 이르렀다고 하는 윤휴가 내뱉은 일갈. "천하의 허다한 의리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다는 말인가!" 뭐 이렇게 멋있는 말을 하다니... 지금도 이 말이 나를 설레이게 한다.

 

특별할 일이 없었다면, 굉장히 고루하고 온고(溫古)적인 범주를 떠나지 않았을 나는 그시절에도, 지금에도 이 구절이 떠나지 않는다. 특별한 일이라고 한다면, 바로 암벽등반 록클라이밍을 하게 된 거다. 북한산 도봉산에서 말이다. 이숭녕 박사는 '산 좋아 산을 타니"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끝맺는다. '이 글을 통해 북한산에 관심있는 후학을 만나고 싶다'. 정파이건 사파이건 나는 그의 후학이라고 자임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