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책갈피가 등산과 관광 기념품이었던 애틋한 시절.

장비의 세계|2019. 11. 7. 15:38

 

전후 관광산업이 슬슬 싹트면서 기념품 사업도 재개되었습니다.

관광과 기념품에 대해 듣고 본 건 일제 시대때 말고는 없었으니, 

새로운 것은 기약이 없고, 그때의 것들을 재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어쩌면 허접해 보이는 책갈피도 그래서 기념품으로 부활했습니다.

1970년이 지나면서 경제발전과 궤를 맞추어 사라진 걸로 보입니다.

그 중 5,60년대 제작되었던 책갈피 몇종을 볼까 합니다.

 

 

경주 안압지를 담은 책갈피 한장입니다.

재질은 일반 종이가 아니라 사진 필름과 같아 빳빳하고 코팅감이 있습니다.

하단에 펜글씨체로 경주고적기념이라고 적혀 있군요.

일일이 한장한장 새겨넣은 거겠죠.

 

1950년대 기념품입니다.

전쟁 중에도, 전쟁후에 수학여행은 재개되었고, 경주는 국가대표로 확실한 도장을 찍었습니다.

변변한 기념품이 없던 시절, 두고온 가족을 위해 기념품을 사오던 풍습은 이어졌고,

따라서 신혼여행이나 수학여행으로 경주를 찾아 구입했으리라 봅니다.

 

 

당시 음운표기법이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돌아간다'을 발음 그대로 '도라간다'라고 해도 통했었죠.

그러나 안압지(雁鴨池)는 한자음 그대로 적어야 했을텐데, 기술자가 실수를 한걸로 보입니다.

실수했다고 귀한 필름종이를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연못 저멀리 구시대를 상징하는 한옥인 동궁과, 연못 월지 주변에 가득한 갈대가 있습니다.

동궁 오른쪽에는 버드나무가 드리워져 있고, 위쪽에 끈 묶는 구멍은 아예 보름달 같습니다.

 

자꾸 보면 마음이 심숭생숭해지는 정경입니다.

헛헛한게 보던 책도 덮고 막걸리 한잔하고 싶어집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은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로 시작하는 "황성옛터"라는 노래가 그냥 흘러 나옵니다.

1928년 이애리수가 부른 이 노래는 전파를 타자마자 곧바로 대박을 쳤죠.

 

 

역시 50년대말에서 60년대 초로 보여지는 속리산 법주사 기념 책갈피 4장입니다.

이건 종이에다가 필름을 인화한 걸 붙여서 만든 수공예작품입니다.

책갈피 뒤쪽에 새까만 종이는 앨범에 붙여 놓었던 걸 떼다가 생겨난 자국입니다.

 

일주문. 추래암. 법주사 전경 그리고 연송이 주이공입니다.

법주사 전경 중의 미륵보살의 모습이 시대를 고증할 증거입니다. 65년에 바뀌게 됩니다.

 

 

흐릿해서 아쉬운데요. 좌측의 두개는 비슷한 시기 일본의 여행기념 책갈피입니다.

아래는 일본을 대표하는 하코네(箱根)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사각형 모양도 있는데, 어디 있는지 찾지를 못했습니다.

 

오른쪽은 제주 기념 책갈피입니다.

 

 

해녀가 막 바다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는 장면을 칼라로 프린트했습니다.

하단에는 '자제할 줄 모르는 ....'이라는 경구를 넣었군요.

칼라이지만 70년대 초 늦어도 중반을 넘지는 않으리라고 봅니다.

 

이런 식의 책갈피는 60년대를 대표하는 명승지마다 있었습니다.

설악산을 위시하여 속리산, 제주도, 경주, 부여권역이 대표입니다.

 

따라서 60년대에는 아직 노출되지 않았던 신생대 5기의 산들 - 이를테면 월악산 치악산 월출산 류 -이나 관광지를 가리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습니다.

 

종이를 접어 책갈피로 하는 대신, 이렇게 두고온 가족을 위해 기념품으로 굳이 팔고 샀던

애틋한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어떤 인연으로 이 소소한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살아 남아서 이곳 등산박물관에 들어왔을까요.

 

 

 

 

그후) 서점마다 또는 책발행 기념으로 책갈피를 나누어주고 모으던 '살뜰한' 문화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시절이 꿈인가 싶을 정도로 '어느날' 사라져 버렸습니다.

뭐가 뭔지를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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