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정계비는 과연 1931년 사라졌을까요

등산의 재구성|2019. 10. 22. 00:34

백두산 정계비에 관해서는 한결같이 1931년 만주사변 직전에 사라졌다고들 한다.

혹시라도 그 이후일 가능성은 없지 않을까.

 

 

백두산 정계비의 생전 모습

 

 

정계비가 사라진 연월을 1931년이라고 지정한 건 한 일본인의 기록에 기초한 걸로 보인다. 그해 7월 백두산을 찾은 이로부터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는 말을 전해 들은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가 "백두산 정계비"라는 책의 서문에 그렇게 적어 놓은게 결정적인 증거가 된 듯 하다.

 

알다시피 동북공정과 관련하여 2000년대 백두산 정계비는 한국에서 더 뜨거운 이슈가 된다. 그런데 이에 관한 수많은 기사와 주장에서는 단순히 1931년 사라졌다고 똑같이 언급하고 그칠 뿐 더이상의 자료를 덧보태지 않는다.  

 

해방될 때까지 수많은 식민지 조선인들이 백두산을 찾았다. 그 중에는 백두산 정계비가 사라졌다는 것을 언급한 기록들이 없지 않을텐데,  왜 찾아서 부기하지 않을까. 바로 이 지점에 의문이 든다. 

 

 

일본산악회가 1935년 펴낸 연보 "산악(山岳)"제1호에는 동계 백두산 초등 특집 기사가 들어 있다.

하계 백두산은 백두산의 밋밋한 산세로 인해 거의 피크닉에 가깝지만 동계는 폭설과 혹한으로 만만치 않았다.

 

동계 백두산 초등은 그해 1월 1일 전후하여, 그 유명한 이마니시 킨지가 이끄는 교토 제국대학 산악부에게 영광이 돌아갔다. 이 기사의 일부를 보면서 궁금증은 더 커졌다.

 

 

'백두산과 부근 개념도'라는 이름의 지도에는 백두산 개념도와 그들의 진행사항이 담겨 있다.

혜산진에서 출발한 그들은 베이스캠프(BC)를 설치하고, 캠프 1(C1)에 이어 장군봉(당시 그들은 대정봉이라고 불렀다) 아래에 캠프 2(C2)를 설치했다.

 

그런데 정상부근과 캠프2 부분을 확대한 걸 보면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바로 '백두산 정계비'라는 글자와 함께 비석의 모양이 등장한다. 1931년 사라졌다는 게 말이다.

 

 

 

그들은 매일매일 일지를 작성했는데, 관련 일지에는 정계비와 관련하여 이렇게 적혀 있다.

 

1월 5일.

"정계비 부근까지 나아간 다음, 장비를 두고 캠프1으로 돌아왔다."

 

 

 

1월 6일.

"정계비 바로 아래(直下)에 캠프2를 설치했다."

 

정계비가 없었다면 어떻게 '정계비 터'가 아니라, 그리고  '바로 아래(直下)"라는 표현이 가능할까?

 

이어지는 글에도 정계비의 유무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정계비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비석인지 몰랐을 리도 없다.

 

원정대는 백두산 동계 초등과 함께 학술 탐험을 겸하고 있었는데, 최고의 엘리트이기도 한 대원들은 돌아가서 각각 자기 분야의 논문을 작성했다고 한다. 이런 터에 만약에 백두산 정계비가 사라져서 없었다고 한다면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두산 정계비는 만주사변을 앞둔 '그들'에게는 더더욱 의미심장한 비석이기 때문이다.

 

 

1935년 그해  "백두산 - 경도제국대학백두산 동계원정대보고"를 내는데, 이 보고서는 이후 원정보고서의 전형이 된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산 2010년 3월호의 "1935년, 동계 백두산에 처음 오른 일본인들 이야기"를 참고하면 좋겠다.

 

그들이 글을 쓴 자세는 대체로 이러하다. 그들은 장비, 식량, 일정, 날씨 등 제반 분야에 걸쳐 치밀할 정도로 꼼꼼히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원정을 준비하고 보고서를 집필하기 위해 참고한 서적목록이 나오는데, 중국측의 사서는 물론, "세종실록", "대한강역고""유백두산기""지봉유설"등 근대 이전 40종, 근대 이후 98종 등 자그마치 138종에 달할 정도이다.

 

그런데도 일본산악회의 "산악"과 "백두산"원정보고서에도 모두 정계비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 건 충분히 의문을 품어볼 건덕지가 되지 않을까.

 

1921년 8월 20일 매일신보에서. 백두산정계비의 정확한 문구를 볼 수 있다. 클릭하면 확대.

 

 

앞으로 관심을 갖고 1931년 이후 정계비 관련하여 백두산 산행기들을 눈여겨 보겠지만,

지리산 성모상이 몇번에 걸쳐 없어졌다가 되찾은 걸 아는 이라면 의문을 품어봄직 하다.

 

"과연 1931년 여름 만주사변을 꾀한 '음모'로 인해 영원히 백두산 정계비가 사라지고 말았을까?

아니면 누군가 다시 세워 놓았다가 그 이후 영원히 사라지게 된걸까?

 

 

 

추가) 이후 입수가능한 다양한 자료를 살펴보았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지만, 1931년은 근거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다. 인멸주체도 일제가 아니라 비분강개하는 조선인일 가능성이 높다. 상세한 내용은 다시 논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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