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판매용 사진의 예 - 중일전쟁 후 베이징 관광기념 사진
일제시대 관광지에서는 관광지를 담은 인화사진도 팔았습니다.
인화사진은 해방 후 가장 이른 시기의 관광기념품이기도 했고요.
사진기가 귀했던 시절이기도 하지만,
다목적의 사진엽서도 아닌 사진을 팔았을까 등등에 대해서는 (-> 여기를)
사진의 용도상 매 사진 앞쪽마다 명승지 이름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사진 뒤쪽에 적어 놓은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은 그 예로 중일전쟁후 베이징을 담은 사진 3장을 선보입니다.
조선 것이 아니라 아쉽지만, 조선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우리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북경 자금성입니다.
일본은 어느 명승지이건 명승지를 소개할 때 이렇게 조감도부터 시작합니다.
지금 구글에서 검색해보아도 되지만, 거의 모든 자금성 조감도는 좌우대칭입니다.
이 사진은 무슨 까닭인지 다분히 의도적이겠지만 좌측만 담았네요.
뒷면에 이곳이 어디인지 적혀 있습니다.
굳이 앞쪽이 아니라 뒤쪽을 적은 이유에는 이런 것도 있을 겁니다.
뒤쪽에 설명이 있으면, 사진첩에 붙여 놓으면 마치 자기가 찍은 것처럼 할 수 있다는 거겠죠.
여기서 등산박물관의 추리본능은 시작됩니다. 이 사진을 언제 찍었는지 대강을 알 수 있다는 거죠.
첫줄에 "명랑북경"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명랑(明朗)이라.......
"모든씨크 명랑",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명랑이라는 용어는 익숙해서 그렇지 우리말이 아니라 일본말(めいろう 메-로)입니다.
그것도 총독부가 1930년대 들어 우리에게 강요한 용어, 만들어진 감정입니다.
식민통치와 대공황이라는 시대적 배경하에 우울과 퇴폐대신에 미소, 청결, 웃음 등이 강요되었죠.한때 변웅전의 '명랑 운동회'라고 유행했는데, 이 명랑이라는 건 순한글주의자들이 보자면 상당히 왜색이고, 불편한 용어입니다. 요즘 주목받는 용어 '감정노동'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죠.
재미있는 것은 이 명랑이라는 것이 유신공화국때 다시한번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정권이 스스로 강팍할수록 세상은 '명랑'해지라고 강제하는 건 똑같네요.
따라서 이 사진은 '명랑북경'이라는 말을 통해 1930년대 북경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사진을 보면 더 정확한 시기를 비정할 수 있습니다.
말들이 짐을 줄지어 싣고 오는 모습을 담은 이곳은 어디일까 싶습니다.
뒷면에 장홍교長虹橋 - 추억의 노구교盧溝橋'라고 적혀 있군요. 아항!
루거우차오교는 1937년 중일전쟁의 시발점으로 알려진 곳이죠.
북경을 점령한 일본인들이 보기엔 '추억(!)'이 돋는 장소이겠죠.
식민지 조선에서는 벽제관이 이런 역할을 했습니다.
임진왜란때 평양에서 대패한 왜군이 벽제관에서 역전승을 함으로써 전세를 바꿉니다.
따라서 벽제관은 전승지로서 일제시대 상당한 근교 명승지 노릇을 합니다.
세번째 사진 역시 어디일까요?
명나라 13릉(明十三陵)이라고 하네요.
검색해보니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약 50키로 떨어져 있는 천수산 기슭에 있다고 합니다.
진시황이나 조조나 옛 중국의 황제들은 능묘훼손 등의 이유로 밀장을 했는데, 이들은 다르군요.
이렇게 딸랑 세장 밖에 없는데요. 원래 세트는 8장, 9장, 10장 등등 정해진게 없습니다.
전체가 다 있었더라면, 지금 북경하고 그때 북경하고 관광포인트의 변화를 알 수 있었을텐데요.
이상 관광기념품의 원조로서, 일제시대 상업 사진의 한 예를 보면서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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