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재떨이... 진주 촉석루를 태운.

등산의 재구성|2020. 9. 17. 23:58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가까이 된 일제시대 재떨이를 소개합니다.

서부경남 최고의 명승지인 진주 촉석루 관광 기념품이고요.

오늘날 바짝 찌그러진 가부장의 권위, 애연가의 포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등산박물관에 일제 등산기념품은 극히 적은 비율을 차지한다. 주된 이유는 자금 부족이고, 두번째 이유 역시 자금부족이다.^^  이 재떨이 사실 적지 않은 가격으로 구입했다. 세번째 이유는 너무 먼 과거에 대한 애정 부족이다. 그래도 일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서민'들의 관광의 출발점이 일제 시대이기 때문이다. 


고구마형 또는 감자형의 재떨이다. 일제시대 목기 기념품의 전형답게 옻칠이 되어 있다. 누구한테 배운바가 없어 - 학위가 없어^^ - 장담을 못하지만 일제시대 기념품이 거의 확실하다. 판매자의 신뢰도에 비추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재떨이는 일제시대 이후 유력한 관광기념품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를 위한 기념품을 산다는 것은 기념품의 ABC이다. 이는 7,80년대도 마찬가지이다. 나무, 돌 쇠로 만든 재떨이가 주된 아이템이었다.



사이즈도 역대급이다. 삼십센치를 넘는다. 명색에 박물관을 운영하다 보니, 이런저런 채널을 통해 어쩌다가 조선시대 재떨이도 보게 된다. 조선시대 그놈의 양반네들 권위야 더했겠지만, 그들의 재떨이는 이렇게 예술적이지 않고 단순한 디자인이다. 주목해 보지 않았지만, 조선의 국왕들의 재떨이도 작고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식의 작고 모범생 스타일임에 분명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애연가라 기록사진에서 허다하게 재떨이들을 살펴볼 수도 있다. 그냥 '실용적인' 수준에 그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높이도 작지 않고, 나무 재질도 단단하여 무게가 장난 아니다. 받침대도 있는걸 알 수 있다. 어떻게 이 색감이 이태껏 살아 남았을까? 옻칠의 힘일 것이다. 참고로 예전에 말한 적 있지만, 소문자 china는 도자기, 소문자 japan은 옻칠을 뜻한다. 


옛날 아재들이라면 송강호가 고고성을 울린 영화 넘버3의 박상면 재떨이를 알 것이다. 이 크리스탈 재떨이는 위의 재떨이에 비하면 애교수준이다. 무게를 비교해 볼 수가 없어 한스러울 뿐이다.

진주 촉석루 관광기념이라고 적혀 있다. 페인트 비슷한 걸로 붓에 묻혀 썼다.


이게 만들어진 건 진주시내가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서부경남 최고의 명승지, 합천 해인사에서일 것이다. 홍류동 계곡을 따라 깊은 숲을 올라야 했다. 그곳은 관광기념품 유통이 가능했고, 따라서 그곳에서 만들어 진주로 보내졌을 것이다. 이건 해방후 6,70년대에도 목기 제품은 그렇게 유통되기도 했다.

재떨이라는 게 가문의 영광도 아니고, 그 험악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다. 안에는 갈라졌는데, 나도 모르게 냄새를 맡아보았는데 냄새가 사라졌다. 고맙다. 



이렇게 바닥에는 세개의 받침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좌측의 받침대는 옹이처름 나이테가 있는데, 오른쪽 두개는 끌칼로 새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다음에 나무 전문가에게 한번 보여서 의견을 듣고 싶다.



금방 알아차린 건데, 이게 수평이 맞지 않다. 왼쪽, 진주촉석루 관광기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부분이 낮고 오른쪽이 높다. 불량품일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듯 싶다. 오른쪽이 갑(甲)이 앉는 쪽이다. 담배를 교만하게 피어 본 이들은 알겠지만, 오른쪽 높은 쪽에서 탁탁 털면 재도 덜날리고  될 것이다. 필시 이 놈은 당시 유세깨나 하는 이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일테다. 


고마워. 이렇게 살아남아서 등산박물관까지 와 주어서. 그시절 누군가는 진주 촉석루를 찾았고, 기념품 가게에서 무엇을 고를까 만지작만지작했을 뒷모습을 상상하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이런 문화는 조선 시대 때는 없었던 것. 그리고 지금 사라진 것.


너도 고백해. 사실 내가 고맙지? 이곳을 통해 너의 존재가 100년 뒤 한국의 방방곡곡, 구글을 통해 '뜻이 있는 이들이라면 전세계 어느 나라에까지 퍼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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