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육혈포 사건 - 암살시도였나, 강도단이었나.
한용운이 스님이 되고 나서 초기 행적을 '등산과 여행' 관점으로 볼 부분이 있다. 근대 설악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터에 설악산 백담사와 인연이 깊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그는 설악에 대해 별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는 넓은 세상을 보고자 해외 여행을 꾀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백담사에서 출발하여 계곡을 건너고 하는 부분부터 꽤 리얼하다. 그러다가 원산인지 함흥인지 - 오래되서 갸웃거리게 되네 -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간다.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를 일진회로 오인한 독립군들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이건 윤색된 이야기로 드러났다.
최근 칸옥션에서 선보인 한용운 스님의 우편엽서이다. 여기에 그 사건에 대한 진술이 있다. 애시당초 한용운 스님이 직접 일진회와 독립군 식으로 이야기를 한 것 같지는 않다. 후학들이 '소설화'하지 않았나 싶다. '블라디보스톡 - 일진회 - 독립군'이라는 포맷은 블라디보스톡에 독립군의 세력이 상당하게 포진했다는 뉘앙스를 주려한 의도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블라디보스톡은 화려한 국제도시였고, 조선 독립군들이 활약했을 거다.
그렇다고 곧바로 한용운 스님과 연결지어서는 안된다. 엽서에서 그는 '로봉강도육혈포3발'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니까 길에서 강도를 만나 육혈포 3발'이라는 거다. 한용운 스님은 강도를 만난거다.
재미있는 것은 이 강도가 맥락상 조선인으로 읽혀야 된다. 독립군, 일진회 운운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조선인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여행하는 조선인 스님에게 강도질을 한 셈이겠다.
독립군일 가능성일 수도 없지 않겠다. 일본이 만주에서의 비적소탕전이 실제로는 조선인 독립군과의 전투임을 호도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역시 맥락상 단순히 강도라고 보아야 '상식'에 부합하겠다.
여기서 심우장에 관한 신화도 한번 언급해야겠다. 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것 말이다. 이게 팩트라면, 우선 이곳에 굳이 집을 지은 이가 한용운 스님이어야 한다. 그런데 나무위키에 의하면 '1933년에 벽산 스님,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에 의해 세워졌다.'라고 하고 있다. 좀더 확인해 보아야 할 부분이긴 하다.
나는 아직까지 그곳이 어디인지 가 보지 않았지만, 어떤 이의 기록에 의하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한다. 심우장이 있는 곳은 산의 북사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집을 북쪽으로 향하게 지어야 한다. 내 짐작으로는 한용운이 아니라 그 누군가 후세인이 처음 이런 재미있는 소설을 지었을 거라 본다.
설령 그가 직접 장소를 물색하고 지었다고 해도 마찬가지 결론이다. 왜 굳이 총독부 가까이 집을 지으려 했을까라는 의문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정말 '총독부가 보기 싫'다는 의도가 강했다면서 왜 그곳을 선택했을까?
동쪽이건 서쪽이건 사대문 밖으로 조금만 나가도 허허벌판이고 총독부는 보이지 않는다. 남산의 앞쪽이나 한강 남쪽으로 가서 아무데나 자리잡아도 된다. 요인즉슨 총독부로부터 조금만 떨어져도 또는 앞쪽에서 남향으로 지으면 그냥 쉽게 풀릴 일이다. 1933년 55세의 한용운은 당시 대단한 존경과 명성을 지니신 분이라 집을 그냥 지어 줄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그렇다고 한용운 스님과 그의 사상 - '거의' 알지 못하기에 - 에 발목을 잡으려는 건 아니다. 다만 후학들이 글을 쓸때 너무 띄우기 위해 오버하는 경우를 저어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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