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동이 가장 화려했던 시절... 우리가 묵었던 여관들...
설악산 팜플렛은 적지 않고, 적지 않게 모았습니다만 항상 결핍을 느꼈던 게 있습니다. 설악동 여관들의 이름들을 알고 싶었다는 거죠. 이번에 마춤한 자료를 갖게 되었습니다.
속초시에서 펴낸 "국립공원 설악산" 팜플렛입니다. 연도는 적혀 있지 않지만, 설악동으로 옮긴 다음 이를 소개하고자 하는 의도로 발행된 것입니다.
지금 이 장면만 보아도 설레는 분들 많을 겁니다. 제 짐작으로는 마등령에서 찍은 것 같은데요. 금강산의 대표적인 이미지인 침봉 모습을 재현하려 찍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빨간색으로 표현한다는 것과 설악의 영어 표기법이 Sorak에서 언제쯤 Seolag으로 바뀌었는지는 여러번 말씀드렸습니다.
가까이 소나무와 원거리 침봉을 결합하는 건 당시 흔히 보이는 풍경사진 연출법입니다. 하단에 발행주체가 속초시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설악산의 명소를 몇군데 소개하고 있는데요. 상단에 신흥사가 있습니다. 어쩌면 신흥사가 딱 저정도의 역사와 저정도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것도 설악에는 다행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역사와 일화가 풍부하고 국보가 많다고 해보죠. 그렇다면 속리산 법주사나 경주 불국사처럼 사찰이 중심이 되고 설악산은 배경이 되기 쉬웠을 겁니다.
하단에는 물론 설악산의 얼굴인 흔들바위가 있습니다. 빨간 상의. 빨간 신발. 그시절 패션감각 지금보아도 뒤지지 않습니다.
일몰이었으면 좋으련만, 아무튼 일출과 케이블카는 지금 외국의 관광 명소와 다름없습니다. 케이블카. 역설일 수 있겠는데요. 그시절 케이블카가 있었기에 '선망'과 '호기심'으로 설악을 찾고, 설악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세자 모두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기차도 한대, 비행기도 한대이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시절 설악동은 화채촌, 달마촌 그리고 달마촌 상가로 불리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방이 두곳, 기념품상가가 8곳이 있었고요. 엄청난 양의 여관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하나 이름들을 읽어보면 참 잘 지었네요...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小學校) 때 책상(冊床)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 잠” “라이너 · 마리아 · 릴케” 이런 시인(詩人)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윤동주가 별헤는 밤에서 이런게 떠오른다고 했죠. 저는 설악에서 한도, 금강. 설화 하얀집. 동산. 동해. 스마일 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 역시 수학여행때 아무래도 저 여관 중 하나에서 묵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입구에서 사진이라도 찍어 놓았다면 좋았으련만.
당시 호텔과 야영장 등등 부대 정보들입니다.
주차는 공짜가 아니라 요금을 내어야 했따는 것.
토산품으로는 꿀, 버섯, 잣 그리고 오징어. 수공예품으로는 ㅇ니두와 목각품, 돌조각 그리고 옥제품 등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설악산이 내세우는 음식은 표고정식과 잣죽이라고 하는데... 글쎄요. 이건 호텔에서의 이야기일테고요.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래도 안주꺼리가 되는 음식을 선호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상 1980년 전후 설악동이 만들어지고, 온국민이 설악이라는 공동의 추억을 갖던 시절의 팜플렛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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