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담 선생님의 사인본을 받다.

등산의 재구성|2020. 7. 14. 21:37

한국 산악회의 최고 원로인 전담 선생님의 사인을 받았다.

6월 29일 '설악산 10동지 기념비를 국립산악박물관 야외에 설치'하는 행사가 열렸다. 산악박물관에 전담선생님이 참석하시는지 문의를 했더니 참석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아직 한국산악회 회원도 아닌데다 대절 버스의 좌석이 꽉 찼다고 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고민고민하다가 변기태 형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올해 한국산악회 회장이 되었으니 아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겠지. 회장이 사인을 부탁하는 건 모양새가 안나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그분의 사인을 가질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 쭈삣쭈삣 부탁했더니 역시 흔쾌히 수락한다. 다만 행사진행하다 잊어버릴 수 있는게 걱정이라 하길래 행사 도중 두번 문자를 보냈다.


전담선생님에 대해 따로 이야기를 더 해야 하는데, 우선 사인을 선보이고 글을 덧보탤까 한다.



선생은 1935년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으니 올해 한국 나이로 86세가 된다.

몸이 좀 불편하시다더니, 손끝이 좀 흔들린 느낌이 전해진다.


연도를 잘못 적어 가슴에서 두번째 A4 용지를 꺼내 다시 부탁드렸다고 한다.



이제 '전담'의 에너지가 전해진다. 

글씨체에 힘이 실려서 인수봉 바위와 설악의 심설과 함께 해온 그의 인생이 되살아난다.

85세가 아니라 14세 한국산악회에 입회할 때라고 해도 되리라.


한국산악회 60대에게도 '담이 형'이라고 불린다는 전담 선생은 그러나 책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행사에서 방명록에 서명했을 경우는 제외하고 이렇게 온전한 사인본이 얼마나 있을까.

아무리 '형'이라고 불릴 정도로 친분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후배들이 받았을까.


김영도 선생님의 70년대 사인본, 80년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사인본을 모두 갖고 있다. 전담 선생님도 만약 젊은 시절의 사인본을 누군가 갖고 있다고 하면, 오늘의 것과 비교해 보고 싶다. 


몇년 전부터 산악계 원로들과 선후배들 사인과 산에 관한 단상을 받아왔다. 100명 넘어서고 있는데, 이부분은 다시 써야겠지. 아무튼 그의 사인을 후배들 사이에 공유할 수 있어 기분이 좋다.



선생의 일생은 2018년 국립산악박물관에서 낸 '사람 산을 오르다3"을 보면 좋겠다.

책에는 박봉래, 박상열, 허창성 그리고 전담의 구술 보고서가 있다.



40페이지에 걸쳐서, 그에 관한 잡지기사들. 선후배들의 회고 등이 모두 모여 있는 좋은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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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잠간 핀트를 돌려서

 그의 유년시절에 있어서 이해 어려운 대목이 있다. 먼저 그의 집안에 대해 잠시 적는다.



전담의 산악인생뿐 아니라 그의 집안도 주목을 해 볼만 하다.

'한라산 전탁'으로 검색하면 알겠지만, 그의 삼촌 전탁 역시 한국산악회의 창립기를 수놓은 분이다. 전담이 산으로 빠진 건 전적으로 전탁의 영향력이다.


"삼촌은 스키광이었어. 1943년 9살때 미스코시 백화점으로 나를 데려가 나무로 된 정식 스키를 사주었어. 당시엔 몹시 귀한것이지....' 주말이면 삼촌따라 원산 부근의 삼방스키장으로 떠났다고도 한다.


이렇게 회고했다시피, 당시 전담 집안은 상당히 부자였던 걸로 보인다. 조모가 전주 이씨로 왕실의 손녀딸이라는 게 아마 적지 않은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조부 운농 전훈은 구한말 성균관 유생으로 성재 이시영 선생 문하에서 수학했고, 광복때까지 삼청동에 살면서 상투를 자르지 않고 창씨를 거부했다고 한다. 항일유학자라고 한다.


그런데 그의 아들 전탁은 스키를 타고 전문등반을 하는 등 근대문물의 섭수에 전념했다.

전탁은 1948년 한국산악계 최초의 조난사고로 기록된 한라산 원정에서 조난당했다.


이제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부분은 이러하다.


전탁이 죽고 나서 '집안 어른들의 논의가 있었다. 결정은 놀라웠다. 집안 어른들은 당시 소년이던 전담에게 산악인이 되기를 주문했다. 전담은 그냥 소년이 아니라 장남의 아들 그러니까 장조카인데도 말이다! 계속 인용해 본다.


'모험과 등산을 즐기는 집안의 전통을 대표해 산악활동을 하던 삼촌이 죽었는데, 누가 이 전통을 이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이유였다.


집안어른들은 당시 14세의 중학생이던 큰아버지의 큰아들 즉 집안의 장손 전담을 한국산악회에 입회시켰다. "



예전에도 이 이야기를 모르든 바도 아니었다. 그때마다 대단한 집안이라며 감탄하며 읽었다. 그런데 오늘 갸웃거린다. 그 '대단한'의 뉘앙스가 조금 달라졌다.


양반들이 대를 이어 과거 운동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조선시대에 과연 이런 예가 다시 있을까? 신분세습의 경우를 제외하고 지배계급이 책읽는 것 말고 자식에게 자기의 업을 권한 이가 단한명 있을까?


화가의 길을 선택한 양반이나 중인이 자기 자식에게도 화가를 시키려 노력했을까? 지도나 과학의 일은? 양반 중 무반 과거합격한 이도 가능하다면 자기 아들은 문반 과거를 준비시켰을 것이다. 일제시대 때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2020년 지금도 뭐 별다르지 않지 싶다. 한국인들의 DNA에는 이런 게 별로 없다고 본다.


등산은 심지어 이런 것도 아니다. 

민족운동도 아니고, 직업도 아니고 세상에서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취미일 뿐이다. 

그것도 목숨을 잃기 쉬운. 


'가족 중에 목숨을 잃은 걸 실제로 본' 전씨 집안은 놀랍게도 14살 어린 아이를 산으로 내보낸다.

이게 과연 조선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생각일까?

아니면 근대(!)의 세례를 받아서 가능한 일일까.


'모험과 등산을 즐기는 집안의 전통'이라는 건 우리나라에서 달리 예를 찾기 어렵다. 희유하다.










ㅁ 참고로 1943년 44년에 그는 삼촌따라 원산의 삼방스키장에 주말이면 다녔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43년 44년이면 일본이 총력전을 펼치고, 점점 패전의 늪으로 빠지고 있던 터였다. 총독부는 정책상 여행과 관광을 제한, 금지했다. 기차를 이용하는 시민들도 여행이나 관광객 차림새를 비애국적 자세라며 꺼려했다. 스키장은 신체단련(그들 표현으로는 연성)의 일환이라 예외였을까? 별 대수로운 건 아니지만, 앞으로 관심갖고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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