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한국산악회 울릉도, 독도 학술 조사대에 관하여...

등산의 재구성|2020. 7. 10. 11:47

일제시대 남조선의 산들은 북쪽의 산들에 비해 차별을 받았다. 

삼림자원, 지하 자원 등도 편중되어 있어 총독부나 학자들은 물론이었고, 

산의 표고나 산세도 북쪽보다 못해 당시 산악인들도 별로 주목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해방과 분단 이후 곧바로 한국산악회가 추진한 '국토규명사업'을 10여 차례 추진한 것은 시의적절했다.



이 사업으로 인해 한국산악회는 그 위상과 진가를 세상에 선보였는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1947년 8월 16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된 제4회 울릉도 독도 학술 조사대이다. 이 조사대는 대장 송석하 회장 외 64명의 대군이 참여했는데, 참여대원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 산악계를 넘어선다.


사회경제 파트에 홍종인, 언어에 방종현 교수, 지리에 정홍헌, 고고학에 김원룡, 식물학에 도봉섭, 동물학에 석우명, 농림 김종수, 지질 옥승식, 의무 조중삼 등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함께 한다.

그 까닭은 울릉도 독도에 대한 과도정부의 영토적 관심이 이 사업을 추동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7년 독도 학술대에 대한 정리와 조명은 산악계 바깥에서도 있었을 법한데, 그동안 우리는 이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 그 이유 중에는 한국산악회가 이 사업을 한국산악회의 것으로 한정해서 보려고 한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다.



"한 사학자의 6. 25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고(故) 김성칠 교수의 명저"역사 앞에서"는 읽어 볼만하다. 개정판에는 해방후 최초의 속리산 산행기로 추정되는 명문의 글까지 들어 있다. 지금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던 속리산 여행기다. 정병준 교수가 해제를 맡았는데, 저서 목록에 "독도 1947"가 있다.



물론 이 책은 단순히 탐사기가 아니라 학자이니만큼 한미일 정치공학적 관점으로 독도를 바라보고 있다. 그 중에 정병준 교수는 산악계가 공유하지 않고 있는 당시 학계의 자료를 이용하여  조선산악회의 독도 탐사를 1장에 걸쳐 할애하고 있다.



읽은지 좀 몇년이 되어 내용이 잘 기억이 안나는데,

목차를 보면 이렇다. '과도 정부의 수색위원회 결정 -> 조선산악회의 합류.

즉 과도정부가 먼저 결정하고 조선산악회가 합류한 걸로 말이다.


한국산악회의 입장은 - 찾아보지 않았지만 - 대체로 이러지 않을까 싶다.

"조선 산악회의 국토규명 운동에 나서자, 정부는 선박과 호위 등을 지원하여 격려하였다."


둘 사이에 선후관계는 이렇게 정반대로 구성된다.





이상 주변에 물어보아도 모르는 이가 많아 '독도 1947'을 소개해 봅니다.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8/2020040800099.html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8/2020040800099.html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10/2020051000399.html?utm_source=naver&utm_medium=original&utm_campaign=news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58510001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43762&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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