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 허백련 선생은 천제단을 왜 이렇게 복원했을까요?
오늘 "쉽게 풀어쓴 심춘순례"를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무등산에 있는 천제단 이야기인데요.
대강을 찾아보니 요즘 말하는 역사 스토리텔링에 딱 맞더군요.
무등산. 천년의 국가 제사. 일제때 파괴, 의재 허백련선생의 복원이라는 컨셉의 합작품입니다.
그런데 사진을 통해 보니 천제'단'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지 않나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1965년 의재 허백련 선생은 왜 그런 형태로 천제단을 만들었을까요?
한결같이 '복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상상'의 작품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복원은 원판과 똑같이 만든다는 뜻이 아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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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 최남선은 석전 박한영과 함께 1925년 50여일간 호남과 지리산 일대를 여행하고 명저 "심춘순례"를 펴낸다. 그러나 고전의 정의 -누구나 찬탄하되 아무도 읽지 않은-처럼 과연 이 책을 읽은 이 얼마일까.
어린 백성이 널리 읽고자 해도 원저는 원래 난해한데다 한문원전과 한자어가 많고 한국어도 오늘날과 달라서 상당히 힘들다고 한다. 이 책 "쉽게 풀어쓴 심춘순례"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영원히 제목만 알고 끝냈을 텐데 감사할 뿐이다.
21장 "다시 무등산을 횡단하다"라는 목차에는 19세기에 그린 '광주무등산도'가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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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아름답고 정교한 그림인데, 그림 한복판의 빨간 원은 증심사 위쪽의 천제봉과 천제단을 표시하고 있다. 천제'단'은 말그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설치한 '단'이다. '단'은 사찰의 석탑처럼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 기도의 '장소'라는 뜻이다.
다행히 요즘 스마토폰 화질이 좋은 시대라 관련 부분을 확대해 볼 수 있다. 소나무숲이 잘 조성된 사이에 과연 평상처럼 평평한 단을 돌로 만들어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인공 구조물은 없고 평평하게 단을 맨바닥에서 높여 세워 놓았음을 알게 된다.
일제 초기에 훼손되었고 이곳을 길지라고 여긴 이들이 몰래 시신을 매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나 보다. 이를 복원한 사람은 무등산과 따로 떼어 놓을 수 없고 남종 문인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 선생(1891~1977)이라고 한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대부분 '복원'이라고 하고 있는데, 현재의 모습은 어떠할까?
산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돌탑을 세워놓았다. 의재 선생과 제자들이 하나씩 하나씩 쌓았다고 한다. 좌측의 파란 간판은 선생의 제자모임인 연진회에서 '천제단'이라고 해서 세워 놓은 것이고, 지금은 정부지원없이 광주민학회에서 해마다 10월 3일 무등산 개천제를 지낸다.
입간판의 위치나 심정적으로나 천제단의 본체는 돌탑이고 앞쪽에 평평하게 쌓은 것은 '돌탑'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단으로 보이게 된다.
이건 복원이 아닌데다, 천제단의 형식에도 어긋난다. 천제단은 '하늘'에 기도를 드리는 것이지, 하늘의 대리물인 돌탑에 드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단'은 당장 생각해도 강화 마니산에 있고, 태백산에도 있다. 그 단들은 모두 하늘에 기도드리기 위해 조성한 제단 형식이다. 혹시라도 지리산 노고단의 돌탑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노고단 역시 기도처였다고 한다면, '단'이었을 것이다. 지리산 국립공원관리소에서는 '노고단은 신라 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련을 하면서 탑과 단을 설치하고, 천지신명께 노고할머니께 나라의 번영과....."라고 적고 있는데, 근거는 없을 것이다. 마니산, 태백산의 천제단의 경우를 보아도 말이다.
예전에도 두어번 언급한 적 있지만, '산'에서의 '정교한' 돌탑은 조선의 풍습이 아니라고 본다. 돌은 물론 애니미즘의 상징이기도 하고 해서 돌탑은 동서고금의 보편적인 문화이다. 우리도 동네 입구에 성황당이라고 오고가며 돌하나씩 던져서 '돌무더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정교하게' 그것도 '산'에 쌓는 건 전혀 다른 맥락이다.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조선의 유산기 상당수를 살펴본 적이 있는데, 산위에서 인위적인 돌탑을 보았다는 기록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19세기 무등산도에도 표시되어 있듯이, 무등산 천제단에 대해 '복원'이라는 용어를 붙이려면 좀더 고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산위에 조성된 돌탑, 그러니까 마이산 탑사가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조성자라고 알려진 이갑룡 처사가 1885년부터 30년에 걸쳐 그러니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건 '카더라'라는 수준의 이야기이다. 그는 1957년 사망했는데 그에 관한 팩트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조성시기를 객관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카더라'가 아니라 돌탑 쌓기의 기법 또는 일제 때 여행기를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조성시기에 대해 문명대 동국대 교수(마이산탑사연구 책임연구원)는 “기법상으로 봐도 돌담식 허튼막돌식 쌓기로 축조하였고 정교한 축조법과 시멘트보강 등으로 보아 1900년대 이후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여기, 여기) 나 역시 이 주장에 심정적으로 찬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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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문장도 잘 다듬은데다 한문에 밝은 분과 스님 등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각주가 정말 풍부해서 술술 넘어간다. 옥의 티 하나를 언급하여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첫페이지에 최남선은 행로를 '대장촌으로, 삼례로 농토야 좋기도 하지만 이 근처가 호남 옥야에서 맨 처음......'라고 말하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대장촌'이 어디일지 궁금해 할 이들이 많을 텐데 그들은 지나쳤다.
펴낸이들은 대장촌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 보았을 수도 있겠는데, 그 이후에 다행히 일제때 조성된 대장촌을 '복원'한 책이 나왔다.
"봉인된 역사 - 대장촌의 일본인 지주와 조선 농민"(윤춘호 푸른길 2017)이다. 일제시대 일본인 지주가 중심이 된 한 시골 마을의 일상과 미시적 삶이 잘 드러나고 있다. 여름휴가기간 보아도 좋을 책이지 싶다. 이 책의 제목이 심춘순례에 등장하는 옥야의 대장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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