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마이산 탑사 세우고 이갑용 처사는 무엇을 했나.
이갑룡 처사는 마이산 탑사 세운게 끝일까? 더 없을까? 그 답을 미리 밝히자면 그는 무등산 갔다.
무등산에서도 탑사를 쌓았다. 아래는 국내 최초로 밝혀지는 그의 후일담이다.
육당 최남선이 등장한다. 그는 1925년 무등산 서석대와 규봉암 근처에 수많은 돌탑을 보았다. 그 돌탑들은 마이산 탑사와 같은 기법이고 놀랍게도 '진안 사는 어느 독지가'가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안 사는 돌탑 전문가'라고 한다면..... 누구라고 추정하는게 합리적일까?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마이산 탑사 방식의 탑은 우리나라에 유일무이하다. 조성자 이갑용 처사는 1885년부터 탑을 쌓기 시작하여 1915년 대역사를 마무리하고 장비를 물에 씻었다는 게 통설 아니 전설이다. 그런데 말이다. 독보적인 탑쌓기 실력을 그냥 썩히고 말았을까?
"쉽게풀어쓴 심춘순례"는 육당 최남선의 명저 "심춘순례"를 오늘날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고 각주를 달아 놓고 있다. 19장은 '성스러운 무등산 순례'이다. 1925년 최남선은 무등산 규봉암을 찾는데,
그 중 이런 대목이 있다.
*일제시대 규봉암 - 출처: 쉽게 풀어쓴 심춘순례(최남선, 심춘독회, 2014, 신아출판사) 이하 동일
진안에 사는 어느 독지가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는 크고 작은 무수한 조탑이 빈 땅을 남기지 아니하리라는 것처럼 옹기종기 늘어섰다.
진안에 사는 어느 독지가라...
그 시절에 이런 이상한(?) 방식으로, 그것도그 숫자가 '크고 작은 무수한' 돌탑을 쌓는 이가 전국에 얼마나 있었으려나. 딱 한사람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잘 아는 그사람. 곧바로 이갑룡이라고 추정해도 무리가 없을 거라고 본다.
이갑룡 처사는 1915년 진안 마이산에 탑을 쌓고 그 실력을 다시 발휘하고 싶었을 것이다. 누가 불러 주어서가 아니고, 누가 돈을 주어서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무등산인가. 무등산은 삼국시대때부터 역시 천제를 지내던 신령스러운 산이고 진안에서 가까워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갑룡임을 짐작할 단서가 더 등장한다.
혼자 여러 달을 두고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저 노릇을 하였다 하니,....
왕왕 여러 사람의 힘이 아니면 움직이기 어려운 것을 높이 올려놓았는데,
그 정성보다도 힘의 초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이산 탑사 중에도 돌 사이즈가 엄청난 것들도 있듯이, 무등산 규봉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이 이갑룡이 아니면 누가 이갑룡일건가. 보산각 뒤 ㅁㅁㅁ라고 하면 편지가 도달하는 시대 이야기이다.
"혼자 여러달을 두고"라고 적고 있는 것도 유심히 볼 일이다. 조성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 진안 마이산 탑사가 30년 운운하는 것은 전설에 가깝다고 본다.
문명대 동국대 교수(마이산탑사연구 책임연구원)는 “기법상으로 봐도 돌담식 허튼막돌식 쌓기로 축조하였고 정교한 축조법과 시멘트보강 등으로 보아 1900년대 이후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여기, 여기) 이 구절이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더라도 정황증거는 될 것이다.
최남선의 마지막 구절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분의 공덕도 공덕이지만 자연의 미를 위해서는 많이 철거하는 편이 더 큰 공덕이 되지 않을까 생각도 났었다." 오늘날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1장 '다시 무등산을 횡단하다'에서는 서석대가 나오고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이 신역을 중심을 하여 천인지 만인지 모르게 탑을 모아서, 모을 수 있는 잔돌을 다 모으고, 세울 수 있는 긴 돌을 다 일으켜 세운 것은 대개 규봉암의 그것과 한가지로 진안 그분의 공양이겠지만.
이 구절 역시 대체로 진안 마이산 탑사의 조성 기법과 똑같다. 동일인의 소행(^^)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누구인지 안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들이 눈에 띠길 기대하면서 잠정적으로 이렇게 정리하자.
1.
1920년 전후 돌담식 허튼막돌식 쌓기로 수십수백의 돌탑을 쌓는 조선인은 거의 없다.
진안 출신의 돌탑전문가라고 하면 바로 그분이다.
무등산 규봉암과 서석대에 수십수백의 돌탑이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면 이 역시 그분이다.
2.
무등산에 있는 수십 수백의 돌탑이 1920년대 전후 몇달만에 조성된 것이라면, 마이산 탑사 역시 1800년대가 아니라 1900년대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성기간도 그렇게 오래지는 않을 것이다.
3.
이갑룡이 무등산에서 마이산으로 돌아간 뒤, 무등산 조탑은 신령스러운 기운을 잃어버리고 무너져버렸다.
4.
조선시대 양반들의 무등산 유산기 찾기 붐은 좀 지양하고 이제는 좀 일제하 무등산 산행기를 발굴하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5대조 조상이 산에 놀러간 이야기 좀 그만하자.
이제 일제하 조선인들의 산행기, 일본인들이 일본어로 씌여진 산행기를 좀 찾아보자. 어릴 적 업어주고 사탕 사준 진짜 할아버지가 무등산을 어떻게 갔는지가 더 궁금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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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다른 학교는 수학여행을 진득하게 한두곳에 집중하기도 한다는데,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선생님들은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전국의 명승지 수십군데를 정신없이(!) 피곤하게 끌려다녀야 했다.
버스에 오르면 다들 졸고, 도착지에 다다라서야 다들 깨어나길 하루에도 몇차례 반복해야 했다. 그 중에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이산 탑사였다. 한국의 불가사의라고도 하는 판에 이갑룡 처사의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이 글은 사춘기 시절 강렬한 추억을 남겨준 분에 대해 작은 보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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