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래 기자님이 말하는 옛 등산용어 '부꾸로'가 무엇일까요?

등산의 재구성|2020. 8. 5. 20:05

지금은 대체적으로 침낭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불렀을까? 아래는 어쩌면 조금은 놀랄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월간 산 박영래 기자님과 오늘 한참동안 이런저런, 옛날과 지금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자답게 기억력이 놀라울 정도라, 이분이 과연 산악계 최고의 주당인가 의심할 정도였다. 

그는 5살 무렵 부산 피난시절 양조장 옆에서 독한 소주한잔으로부터 명정(酩酊) 70년을 이어왔다.

처음에는 영도다리를 넘지 못하고 픽 쓰려졌는데, 몇번 지나지 않아 거뜬히 다리를 건넜단다.


추억 이야기 도중에 보름달 밝을 때 몸도 달아올라 인수봉 올라간 이야기를 그는 이렇게 했다. 



"배낭을 싸는데요. 침낭, 미군 침낭 말이에요. 

우리때는 부꾸로라고 했어요.

닭털로 만들었는데, 둘둘 말면 부피도 대단해요.


그 부꾸로 안에 소주 댓병을 넣어요. 깨지지 말라고.

혼자서 고독길로 올라가서 정상에 혼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거에요.

새벽같이 내려오면 백운산장 이영구 형님이 '이제 그런 짓좀 하지 말라'라고 말을 해요.

이런 사람 있을까요?


내가 '소주병 들고 올라가는 이들은 많아도, 혼자서 '댓병'들고 올라가는 클라이머는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공감하고, '부꾸로가 무슨 말인지 아세요'라고 말추렴을 했다. 

그러자 '글쎄, 그때는 다들 부꾸로라고 했어요'라고 대답을 한다.


부꾸로(부끄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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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대체적으로 침낭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불렀을까? 놀랍게도 1990년 김성진 선생이 펴낸 "등산용어사전"(평화출판사)에는 침낭 항목이 없다. 대신에 슬리핑백과 독일어 슈라프작(Schlafsack)만 있을 뿐이다. 뭐라고?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월간 등산잡지 '산'을 창간한 최선웅 선생은 꼼꼼히 기록을 남긴 걸로도 유명하다. 고등학교 시절인 1960년대 초반부터 기록한 산행 일지를 보면 그는 한결같이 슬리핑백이라고 적고 있다. 


아직 펼쳐보지는 못했지만, 손경석 선생님이 펴낸 1962년 우리나라 최초의 등산서적 "등산백과"(문화당)나 1975년 김원모 선생의 산악소사전(한국산악회)에는 어떻게 적혀 있을지 자뭇 기대가 된다.


지금 당장 생각에는 당시에는 외국어라서 '멋'이 잔뜩 들어간 슬리핑백이 공식용어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산악인들 사이에는 은어로 부꾸로, 부끄로, 후끄로라고도 했다. 



'부꾸로'는 일본말이다. 한자어로는 대(袋)이고 주머니, 자루를 뜻한다.

일본어로 슬리핑백은 정확히 하자면 침낭이 아니라 침대( ねぶくろ 네부꾸로)라고 한다.

사진에서 보듯이 구글에서 袋로 검색하면 우리가 말하는 침낭 일색이다.


이를 줄여서 부꾸로라고 했던 것 같다. 

6,70년대는 일본어를 배척하던 시절이라 젊은 클라이머들은 출처를 알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네이버 검색을 하니, 영어 슬리핑 백에서 나온 스리핑구박쿠(スリーピングバック)라고도 하고, 독일어  슈라프작(Schlafsack)의 일본식 발음 슈라후쟉쿠(シュラーフザック) 또는 앞만 떼어내서 시라후(シラフ)라고도 부르는가 보다.


                    * 한자어 寢囊(침낭)으로 검색하면 이렇게 제각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일본어식으로 침대라고 하지 않고 침낭이라고 했을까?

생각해보면 이유중 하나는 한국식 한자어 발음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한국식 한자어 발음으로는 우리가 집에서 자는 침대(台)하고 산에서 자는 침대() 발음이 똑같다.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면, 이 용어를 두고 산에서 얼마나 많은 유모어, 음담패설이 생겨났을까


한편 일본에서는 침대(台)는 음역해서 신타이라고 부르고 침대()는 훈역으로 해서 네부꾸로라고 해서 두 단어 사이에 오해의 소지가 전혀 없다.


            *잡주머니를 잡낭()이라 하니 없고, 잡대(襍袋)라고 하니 이렇게 주루룩 중국사이트가 뜬다.



이외에도 한국의 언어습관에 주머니에 해당하는 경우 낭(囊)을 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 배낭이 그러하고, 우체부가 들고 다니는 우편행랑, 외교계의 외교행랑, 몸속의 장기로 담낭(膽囊), 음낭(陰囊), 비상시에 사용하는 구급낭, 약을 넣는 약낭 등이 지금도 통용된다. 반면에 대(袋)가 씌인 예는 무엇일까 싶다.


그나마 그럼직한 '전대를 찬다'라고 할 때의 '전대'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돈을 넣은 띠 대(帶), 그래서 전대(錢帶)라는 걸 알게 된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쌀포대 할때의 포대(包袋), 쌀부대 할때의 부대(負袋), 마대자루 할때의 마대(麻袋)가 떠오른다. 


근거없이 짐작하건대, 지금 이런 용어들은 대부분 근대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겠다. 조선시대는 '자루' 문화가 없었을 거라 본다. 심지어 양반네들 옷에도 주머니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다. 대신에 보자기 문화라는 게 있지 않았을까.


노원에 아파트단지 없어 밤이 되면 칠흑같던 시절 인수봉 정상에서 혼자서 '이일 저일 생각하면서' 밤을 새는 경험은 어떠할까? 아니 지금처럼 밤새도록 불빛 가득하더라도 저곳에서 오롯히 혼자서 밤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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