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근대 기록일 남한산성 산행기를 밝혀냅니다.
오늘은 한강 남쪽의 명산이자 비참한 역사를 품고 있는 남한산성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입니다. 주제는 남한산성 최초의 근대기록은 언제 누가 썼을까요? 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백두산, 금강산, 북한산, 한라산에 이어 남한산성 각각 최초의 근대 산행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 부분은 맨 하단에 개략해 봅니다. 지리산은 음 아직 밝혀지지 않은 듯 합니다.
그 주인공은 아무래도 1894년 청일전쟁을 취재차 찾은 마이니치 특파원 사쿠라이 군노스케에게 돌아갈 것 같다. 그는 1892년 영국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언론계와 실업계 그리고 중의원을 6선할 정도로 정계에서 활동했다.
취재파일을 기초하여 1894년 여름 "조선시사"를 썼는데, 원문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 번역서는 한상일 교수가 1993년 펴낸 "서울에 남겨둔 꿈"에서 읽을 수 있다. "남한산의 단풍구경"이 오늘 우리가 볼 내용인데, 한해전 1893년 남한산을 올랐다.
번역문을 보면 알겠지만, 그가 쓴 산행기는 제국주의자의 시선이 곳곳에 있어 불쾌한 구절도 적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쓰는 산행기와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다를 바가 없다. 1893년 조선이 끝을 향해가던 무렵 남한산 행로는 어떠했고, 행궁 주변의 풍경은 어떠했는지를 볼 수 있는 귀한 자료라 생각된다. 6페이지에 불과한데다 번역도 유려하여 잘 읽히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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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관광중 특별히 마음에 쾌흥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다름아닌 산하의 경관이었다. 불쑥불쑥 솟아오른 기암절벽과 흰 명주를 펼쳐 놓은 듯 유유히 흐르는 강물 등 산수가 수려하다고 알려진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많았다. 특히 가을색이 산과 계곡에 가득차서 천길 높이의 높은 바위에 단풍이 간간이 물들어 있었다..........(이하 생략)
원래 하루를 묵을 생각으로 나선 참이라 여정인 80리 길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또 도중에 자지 않기로 했다...........
이윽고 광진나루에 도착했다. 광진은 한강 상류로서 수심이 깊고 흐름이 조용해서 얼핏 보기에는 호수같았다. 나루에는 수십 채의 인가가 흩어져 있었는데, 그 중에는 지방에서는 보기드물게 풍치있는 집도 보였다.
삽화가는 일본의 고쿠민 신문의 구보다 베이센이 필자와 동행하면서 스케치 한 것이라고 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일제시대 때 홍수와 산사태로 거의 파괴된다. 그러나 글에 의하면, 1893년 당시 이미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행궁 관련해서는 이렇게 행궁 대신에 당당한 수어장대를 그리고 있다.
남한산도 북한산과 마찬가지로 왕의 피난소인 이궁이 있는 곳이다. 그다지 크고 높은 산은 아니지만 길이 좁고 구불구불하여 가랑비를 맞으며 걸어가려니 무척 힘들었다. 나는 걸을 때마다 하산하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정상이 멀었느냐고 물었는데 그들은 웃고 지나갈 뿐이었다.
산속에는 인가가 수백 호 있었고 남대문 거리, 종로 거리 등 구획 규정이 서울과 유사했다. 황폐한 이궁은 가까운 산허리에 세워져 있어서 모든 산의 정취를 한데 아우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깊은 산속에 있는 개원사라는 절에서 숙박하기로 정했다. 나도 극도로 피곤하여 걷기가 매우 힘들었다. 곱게 물든 단풍잎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흐르는 냇물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암석에 걸터앉아 내리는 비를 맞으며 산서외 레이켄이 경치에 대해 하는 말에 "응,응"하며 건성으로 대답하였을 뿐이다.
삼림속에 있는 개원사는 무성한 고목과 노송이 하늘을 찌르고 있어 낮인데도 어두컴컴하였다. 고요하고 그윽한 것이 실로 신선의 세계였다. 특히 기이한 것은 절 안이 창결하여 오물이나 먼지가 없었고 뜰에는 빗질 자국이 파도 무늬를 이루고 있는 점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저녁준비에 들어가 이곳 명물인 송이버섯과 레이켄이 잡은 새들을 끓였다...
식사후 비로소 생기를 되찾은 우리들은 울긋불긋한 단풍 사이를 제각기 오가며 송이버섯을 찾거나 새를 잡으러 다녔다. 해가 진 후 모두 돌아와 술잔을 나누며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보고 느낀 것을 서로 이야기하였다.
다음날 9월 24일 아침에 우리는 여장을 챙겨 진남문 쪽으로 길을 잡고 남한산 정상의 단풍나무 숲을 벗어났다. 밤새 내리던 비는 완전히 개어 산과 들의 풍경이 봄같이 화창하였고 먼 곳의 경치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시야에 가득 몰려왔다. 일행은 모두 어제의 피로를 말끔히 씻고 길 옆 단풍나무 숲속에 들어가 새를 잡거나 숲속에 들어가 버섯을 캤다. 우리는 새 한 마리를 잡고 버섯 하나를 캐면 곧 낙엽을 태워 그 불로 구워서 먹고 마시며 유쾌한 기분에 젖었다. 한강가의 송파나루 삼전도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일행은 송파나루에서 배를 빌려 덕천으로 가기로 하고 우선 한강에서 수영솜씨를 겨루었다. 소엔, 산소, 엔호 그리고 나 네사람은 알몸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중류까지 헤엄쳐 나갔다. 만일 누군가가 네사람의 머리위에서 내려다보며 사심없이 판단을 내린다면 그날의 우승자는 나라고 말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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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명산에 관해 최초의 근대적 산행기는 무엇일까를 개괄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백두산은 영국의 탐험가이자 등산가인 영 허즈번드의 1886년 글을 최초라 하고 있다. 금강산은 1889년 가을 영국의 캠벨 부영사가 쓴 글이 지금까지는 최초로 여겨진다.
북한산은 1889년 미국 총영사인 찰리-롱, 찰스가 1889년 쓴 '북한산, 왕의 성채(와운루 창간호에 번역전재)가 영광을 차지할 것 같다. 전국적 지명도를 갖춘 이런 산들은 대체로 1880년대 중후반에 '제죽주의적 관심'을 가진 서구인들에 의해 근대적 기록이 씌여졌다.
한라산에 대한 기록도 뚜렷히 밝혀져 있다. 1901년 이재수의 난이 벌어지자 제주를 찾은 독일인 지그프리이드 겐테 박사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한라산을 초등하고, 이어 최초로 한라산 높이를 쟀다고 한다.
그는 1901년 쾰른 신문에 이 산행기를 연재했고, 한국에는 2007년 "독일인 겐테가 본 신선한 나라 조선, 1901"이 번역되어 있다. 제 4편이 모험과 방랑의 섬, 제주도로 그 중에 '한라산 정상에 서다'편이 이에 해당한다. 인터넷에서도 겐테 한라산으로 검색하면 많은 블로깅과 기사가 뜬다. 역시 이재수의 난이 벌어지자 일본을 찾은 아오야기 츠나타로도 "조선의 보고, 제주도 안내"라는 글을 쓴 걸로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같은 급의 명산으로 설악산과 지리산이 있다. 설악산은 1900년대 초반 찾은 외국인의 기록이 발견되어 있는데, 지리산은 과문한 탓이겠지만, 만나지 못했다. 지리산을 사랑하는 지리산 애호가들과 진주 경상대학교의 남명 연구소, 순천 순천대학교의 지리산권문화연구원의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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