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한국 에베레스트 동계 원정을 기념엽서입니다.

등산의 재구성|2019. 10. 30. 18:49

 

1987년 12월 22일, 허영호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그것도 '동계'에 섰다.

성공의 기쁨을 사진엽서에도 남겼다.

 

  *뒷면 설명: 해발 5,400m B.C(베이스 캠프)에 모인 엠에스 산악회원과 셀파

 

허용호가 등정한 다음 베이스캠프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으로 보자면,  좌측 노란잠바가 손재식.  두사람건너 깃발 든 노란잠바가 원정단장 김일권이다.

한가운데에 나홀로 보라색 옷을 입은 대원이 허영호이다.

서있는 사람은 맨좌측 빨간색이 최종열, 노란색이 함탁영, 파란색 거너 빨간색이 정갑수. 그 앞에 입을 벌리고 웃는 노란색이 신승모다.

 

 

뒷면에는 동계원정단의 개요와 원정대 성공의 의의가 적혀 있다.

일체의 원정비를 댄 단장  김일권이 누구일지 궁금할텐데, 따로 글을 올리기로 하겠다.

 

1980년 폴란드팀이 동계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이후 한국대는 87년팀 이전에만 5번이나 시도한다.

6번째 허용호의 성공은 세계 3번째 동계 등반이라는 위업을 달성한다.

 

*사진설명: 해발 3,100m 남체 카라반길에서 본 다우체봉 및 계곡

 

소장하고 있는 것은 12장으로 봉투가 없어서 아쉽다.

카라반 도중의 이 사진이 처음인 걸 보면, 포카라 공항 등에서 찍은 사진들도 있을 것 같다.

 

*해발 5,400m BC에서 본 아이스폴의 눈보라

 

눈사태 장면은 에베레스트의 무자비한 위험을 드러내는 좋은 자료라 선정되었을 것이다.

 

 

뒷면은 이렇게 생겼다.

좌측 상단에 1977년 에베레스트 고상돈의 포즈와는 또다른 자세로 허용호가 서있고,

하단에 후원사인 엠에스 스포츠(Mountain Sport)사의 로고와 사명이 찍혀 있다.

 

 

 

허영호의 자세는 실제가 아니다. 1977년 고상돈의 포즈를 기초로 하여 좀 각색한 것이 되겠다.

'축 한국 동계 에베레스트 등정성공'이라는 글자 주변에 꽃가루가 날린다.

다리도 좀 벌려서 당당하게 표현했고, 왼손 깃발을 엠에스 스포츠사의 로고로 바꾸었다.

 

* 5.400m 아이스폴에서 본 석양

 

이제 한장씩 뒷편의 설명과 함께 1987년 사진작가 손재식의 작품으로 에베레스트를 감상해보자.

 

* 해발 5,600 칼라파타에서 본 황혼에 물든 눕체. 로체 연봉과 그 뒤로 보이는 에베레스트 전경

 

*해볼 5,600m에서 본 저녁노을

 

노을도 산도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동네 뒷산같다는 느낌이 살짝 든다... 

 

*6000m 아이스폴의 사다리 연속 설치 작업

 

*해발 6,100m에 절단된 빙하 위에 건설된 C1 캠프

 

*빙탑 지대에서의 등반

 

아무래도 이 사진은 좀 연출된 느낌이 강하다.

고산등반에 전문등반까지 합해야 에베레스트 느낌이 날테니까 말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허영호 대원(MS 산악회)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본 푸모리봉

 

제목이 조금 아쉽다. 푸모리 봉이 아니라 전경이라고 해야 좋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푸모리봉이 대단한 봉우리인줄 착각하기 쉬우니까 말이다.

 

                                     *세계최고봉 동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엠에스 스포츠=

 

 

동계 에베레스트 초등과 관련하여 두세개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글을 더 올릴까 한다.

 

 

 

 

시민들도 1977년 고상돈의 초등 이후 10년 만에 뛸듯이 기뻐했다.

주된 이유는 고상돈 이후로 '두번째' 세계 최고봉 등정자이어서일 것이다.

김기수 이후 홍수환, 장정구에도 '세계 챔피언'이기에 환호를 보내는 멘탈리티와 같지 않을까.

초등학교 운동회 달리기처럼 1위, 2위 3위를 가르는 것처럼 말이다.

 

산악계가 그러나 환호성을 올린 건 좀 결이 달랐다.

'동계'에 방점이 찍힌다.

산악계에는 산악계만의 논리가 있고 판단기준이 있는 법이다.

동계등반, 말나눌 이 없는 단독등반, 햇볕없는 북벽등반, 새로운 신루트 등반 등등 말이다.

87년 등반은 세계산악계도 쉽지 않았던  '동계'에 방점이 찍힌다.

 

1987년 12월 22일 그래서 우리나라 산악계가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했던 날이 될 것이다.

산악계의 논리대로 산악계가 지향해 갈 큰 추동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후는 알다시피 대체로 국민과 산악계가 거의 한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14좌 완등 랠리라는 길거리 국민 스포츠가 되었고, 점차로 산악계는 복싱계와 같은 처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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