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운각 산장을 건립한 최태묵 선생이 제게 온 까닭은...
어제 1980년대 봉정암 산장과 희운각 대피소 사진과 글을 올렸더니,
희운각 대피소를 건립한 최태묵 선생의 실제 모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최태묵 선생이 존재감 없는 제게 왜 왔을까요. 그건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려 해서가 아닙니다.
설악산에 대해 잊혀져 버린,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간곡히 말씀하시려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설악산 대청봉 정상석에 대해 아마도 상상도 못했을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옛날에 듣기를 공덕중에 큰 것이. 서로 인연을 맺어주는 다리를 세우는 것하고,
비맞지 않게 집을 지어 주는 것이라 하는데, 그분 얼굴 참 좋아 보이네요...
1969년 설악산 십동지 조난사고 이후,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대피소의 필요성을 절감해서
사재 100만원을 털어 희운각 산장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가 세울 당시의 희운각은 이랬을 겁니다.
지금은 옛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지금보다 그때 산장의 필요성은 더했을 겁니다.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등산관과 등산 발자취 그리고 맨 아래에 최태묵 선생의 약력이 나오고요.
그 밑에 1969년 10월 설악산 대청봉에서 찍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관심을 끄는 건 돌탑 앞의 이 정상석입니다.
새까만걸 보니, 1966년 당시 국회의장 이효상이 쓰고 에코클럽에서 세운 "요산요수"일까요?
지금의 정상석 왼쪽에 다소곳이 벽에 붙어 있는 새까만 돌 말이에요.
아니올씨다.
다소 놀라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국과수를 부르면 좋겠지만, 굳이 부를 필요는 없겠고요.
화질좋은 스마트폰을 빌어 대충 읽어보면 一九百六十ㅁ년(196ㅁ 년)은 읽히고요. 그 밑에 大韓ㅁㅁ山岳ㅁㅁ이 적혀 있고, 그 옆에 한글 '의'는 또렷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제는 반은^^ 말할 수 있다'
*사진은 설악행각 모임의 기절거미님의 블로그에서 모셔옴
1966년 10월로 돌아갈까 합니다.
이효상 선생이 '요산요수'를 썼는데, 그 비를 지고 올라갈 선수들이 없었다고 하죠.
그때 그 유명한 에코클럽이 등장합니다. 젊은 친구 김진수. 오운소, 현정웅. 이원의가 나서죠.
정상 표지석이 무겁다고 했는데, 보시다시피 네명의 친구들은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습니다.
저당시 산악인들이 설악산 장기 산행을 할 때는 30kg는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냥 평소 하중훈련 할 정도(도 안되는) 무게처럼 보입니다.
요산요수라 적혀 있는 표지석입니다. 본지 하도 오래되어서 그렇긴 한데, 20kg는 될까 싶은데요.
만약 그렇다면, '무게가 무거워서 난감을 표했다'라는 건 전설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의문을 갖고 보면, 이 비석은 여러모로 의문점이 있습니다.
허접한 비석도 그러하지 않는데,
이 비석에는 세운 연도도 없고 누가 세웠는지도 없고, 대청봉이라는 글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국회의장이고, 당시 대구산악연맹 회장의 글인데 말이죠.
그때는 옛날이라서일까요?
김근원 선생이 찍은 이 사진도 의문이 가득합니다.
"요산요수'바를 세우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에코산악회원이라고 하고 있는데, 참 희안하네.
요산요수는 저만치 뒤에 두고 이쪽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이 비석을 둘러싸고 웃고 있습니다.
그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깨끗한 사진을 다시 보겠습니다.
요산요수는 내팽게치고, 이쪽에서 찍고 있습니다. 좀 황당한 상황이라는 게 느껴지죠?
그들이 이렇게 찍은 필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 글자 첫줄을 저는 가벼얍게 읽을 수 있습니다.
"山은 우리를 부른다"입니다.
이효상 선생이 평소에 즐겨하는 문구라는 걸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ㄷ
두번째 처음은 ' 우리는 산ㅁㅁㅁㅁ'이군요. 이건 좀 더 조사해 보면 다 나올겁니다.
요인즉슨. 요산요수와 이건 한 세트라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1966년부터 자그마치 54년동안 잊혀져 있던 진실을 대면할 시간입니다.
이효상 선생은 두개의 글을 썼습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처럼 당연한 이야기겠죠.
애초 비석 앞뒤로 새기려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이들은 이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앞뒤쪽에 새기려면 당시 석공 기술로는 바위가 두꺼워야 하고,
그렇다면 정말로 지고 오르기가 '대략 난감'했을 겁니다.
이들은 얇은 바위를 선택하여 한개에는 요산요수를, 다른 데에는 누가 언제라는 걸 새긴거죠.
에코 산악회는 그래서 가볍게 지고 올라왔습니다.
김근원 선생은 역시 탁월한 분이라서, 카메라 앵글을 정말 잘 잡았습니다.
요산요수도 멀리 또렷히 넣고, 이효상은 가까이 넣고.
이효상 선생도 요산요수보다 건립자에 포인트를 둔 이 사진에 만족했을 겁니다.
진실은 어렵지 않습니다. 관심을 두기가 어려워서인거죠.
최태묵 선생은 제게 넌지시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한 겁니다.
설악산 대청봉 정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을.
1969년까지는 적어도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죠.
언젠가 설악산 대청봉에 갈 일이 있으면, 주변을 서성거려 보아야겠습니다.
새까만 바위 조각이 있다면 그건 이 흔적일테니까요.
이상 전세계 어디에도 없고, 한국에만 딱 하나 있는, 하나만 있으면 되는 '등산박물관'에서,
캐도캐도 양파같은 우리의 산 이야기 한토막이었습니다....~~~
설악이 좋더라. 이런 이야기가 좋더라^^
출처: 1971년 월간 산 7월호.
덧붙여) 이 외에도 설악산 대청봉에 있던 다른 정상석을 보시려면 다음에서 ' 대청봉 정상석 이화여대 '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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