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이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에게 말했다. "왜 나만 갖고 그래"
남한산성이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에게 말했다.
"왜 나만 갖고 그래"
우리가 잊어버린 남한산성 이야기입니다.
이승만과 남한산성은 그래도 제법 관심있는 이에겐 알려져 있는데
박정희와 남한산성과의 연결은 등산박물관에서 최초 발굴 소개하게 됩니다.
이제 해방후 남한산성의 '묻어버린(^^) 아픔 두조각을 보러갈까요?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이 야심차게 만든 남한산성 사료총서.
한 10권 될려나.
그 중에 등산, 관광의 관점으로 보자면 2권인가 사진으로 보는 남한산성하고, 제6권 신문기사*1899~1962)로 보는 남한산성입니다. 나머지는 잘난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조선시대 문헌들 연구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왜 근현대 조사는 치지도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남한산성은 일제시대 신작로가 만들어지면서 정상까지 택시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정상에는 식당과 요정들도 있어 경성에서 부지기수로 달려왔죠.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요. 오늘은 해방 후 1962년까지 남한산성 기사 중에 정치적인 부분만 모셔옵니다.
1954년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었습니다. 이 사실 예전에 등산박물관에서도 두어번 조명했는데, 여전히 모르는 분들 많습니다. 국립공원 개원식을 어디에서 했을까요? 행궁이 아니라 놀랍게도 서장대(수어장대)였습니다. 전쟁 끝나고 행궁은 그시절 엉망에 가까워서일겁니다. 전주이씨 이승만 대통령은 왠만하면 행궁에서 했을텐데 말이죠.
최초의 국립공원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취소'해버립니다. 이후 지리산 국립공원이 생겨날때까지 우리나라는 국립공원 없었더래요.
두번째 정치적 사건. 이대통령의 팔순 '탄신일'을 맞아 송수탑을 세웁니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
재미있는 것은 맨밑의 두줄입니다.
한편 이날 광주 복정리로부터 남한산성에 이르는 신도로 7키로 육백미터(^^)를 이 대통령의 아호인 우남 두글자를 따서 우남로로 하는 명명식이 하오 육시경 거행되었다.
참 자상하게 7키로 600미터라고까지 하는군요. 지금 이 도로를 우남로라고 할리는 만무한데 약진로라고 하는지, 남한산성로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송수탑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채 한달이 되자마자 5.16 군사혁명기념탑이 세워집니다. 그것도 '남한산성 중턱에 말이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육군형무소 재소자 일동이 5.16 군사혁명을 기념하고자 바로 그다음날인 5월 17일부터 기공한 군사혁명기념탑이 6월 26일 남한산성 중턱에 준공됩니다.
높이가 60여척, 그러니까 18m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작으로, 보통은 6개월내지 1년이 걸리는데, 어떻게 한달만에...그건 육군 재소자들이 피땀흘려 만들었죠. 이들은 나중에 '특사'의 은전을 입게 됩니다.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기념탑 상층에는 봉화를 드높이는 혁명용사가 기아와 절망에 빠진 국민을 구출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으며...." 군인 키가 16척이고 아래도 5.16과 같은 돌림자인 6.25 동란때 참전했던 16개국 깃발이 게양될거라 합니다.
이 모든 역사를 이루신 분은 교도소장 홍의선 중령의 열성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홍의선씨 나중에 무엇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영달을 했을 것 같기도.
기아와 도탄에 빠진 농민을 일으켜 세우는 16척의 국군.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어딘지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서는 밝히지 안(못^^)했습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버러리에서 한번 검색해 보면 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남한산성 중턱에 있다고 하면서 왜 이 사진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관광객을 볼 수없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이런 거 좋아했는데 말이죠. 그건 놀랍게도....
1년뒤인 1962년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다른 기사들도 다 '중턱'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 기사에서는 놀랍게도 길거리가 아니라, 육군교도소 형무소 '뜰"이라고 합니다. 정론직필 신문이군요. 참내.. 이왕 만들거라면..~
놀랍게도 1년 뒤에도 홍의선씨는 여전히 중령이었네요. 5.16 당일 오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충성을 인정받지 못한 셈입니다. 남한산성 로터리쯤에 하면 좋았을 텐데, 그러자니 재소자들이 도망갈 수도 있고. 이곳에 지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 합니다.
그는 이런 걸 다 자랑합니다. "남산의 이승만 박사 동상이 부서진 뒤이므로 높이가 우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또 상이 두사람이라는데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네요.
기사에 들어간 삽화를 보니, 역시 왼쪽에 건물이 있군요. 교도소인 듯 합니다.
남한산성에 이렇게 현직 대통령에 대한 충성경쟁이 있었다는 건, 그만큼 남한산성이 인파가 몰려드는 곳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비석을 하나 더 보았습니다. 이 것도 5.16 군사혁명기념비라고 적혀있는 돌비석인데요. 1961년 8월 15일 세웠다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오일육 쿠데타 당해연도인데요. 누가 세웠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위의 예를 미루어 짐작하면. 마산에 있는 군부대가 아닐까 싶어요. 급하게 이런 거 하는 건 돈없는 공무원보다도 몸으로 때울 청춘이 많은 군대가 아닐까 싶은데요. 1999년에 철거하여 개천에 버렸다고 합니다.
한때 남한산성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소소하게 과거로의 여행이 코로나 시대에 제맛입니다.
이상 이 한장의 사진 이야기였습니다.
놀라워라. 등산박물관 '우리들의 산' 파워가.
한국에 이런 박물관 하나쯤 있어도 좋습니다. 하나만 있어도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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