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대청봉 정상석, 요산요수, 이제는 알 수 있다.

등산의 재구성|2020. 10. 17. 13:00

설악산 대청봉에 허다히 있던 정상석에는 '대청봉'도 있고 '양양이라네'도 있지만 

그 중 스토리텔링이 가장 강한 것은 1966년 이효상 국회의장의 글이라고 하는 "요산요수"입니다.

 

10월 6일  이 비석에 대해 글을 올렸는데요. 오늘은 추가 글입니다. 

인연은 인연으로 이어진다는 걸 새삼 알게 합니다. 인연이 저를 이끈다고 해도 되겠네요.

 

 

1966년 당시 국회의장이라고 하는 한솔 이효상 선생이 설악산 대청봉에 정상석을 세운다.

그때 그가 이용한 운송수단은 군대도 아니고, 헬기도 아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에코클럽의 20대 젊은이 4명과 김근원 사진작가이다.

 

김근원 선생은 "요산요수" 사진을 찍는다면서 좌측의 사진을 남기고 있다.

이게 무슨 글자일까?

 

 

당시 정상석을 세우고 에코클럽 회원들은 저만치 "요산요수"를 저만치 따돌리고, 이쪽 비석을 둘러서 인증샷을 찍고 있다. 이 무슨 해괴한 상황인고,.

 

 

다행히 세계 유일로 한국에 등산박물관 '우리들의 산'이 있어 맨 좌측 첫줄을

"산은 우리를 부른다"라고 읽고, 이를 한솔 이효상의 글이라고만 하고 말았는데...

 

인연은 역시 인연을 부른다. 글은 글을 부르고, 성공은 성공으로 이어지는 법.

세종알파인 클럽의 고문으로 70년대 많은 산행 기사를 월간 산에 기고한 이영희 선생이 1968년 8월 15일부터 21일까지 설악을 찾고 "설악예찬"을 쓴다. 이 글은 한국산악회 회보, 강원일보 그리고 경남 매일 등에 발표되는데, 정상에서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요산요수'라 쓰인 비석이요, 또 하나는 대한민국 산악인 일동이 세운 것인데 이렇게 새겨져 있다. 

"산은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산처럼 의젓하게 되자."이제 비석이 그나마 반은 제대로 읽히게 된다.

 

그리고 또 인연으로 이어진다.

 

1970년 1월호 월간 등산(아직 월간 산으로 바뀌기 전)의 표지이다.

이 표지가 어디를 말할까?

이곳은 북한산 백운대 아래 뜀바위에 있는 철다리이다. 그때는 철다리가 있었다.

 

(*좌측은 월간 산 박영래 기자님의 사인본. 박영래는 1970년 1월호에 '그 어느날'을 올린다.

로제 뒤플라의 '그 어느날'을 차용한 이 만화는 9월에 그 유명한 '악돌이'로 바톤터치한다.

 

놀라지 마시라. 더이상의 자세한 뜸들이기는 생략한다.

 전형적인 왜식 어법 "야마헤노 미찌"의 번역어인 "산에의 길" 시리즈가 시작된다.

그 처음으로 이효상 선생의 "산은 나를 부른다"가 적혀 있다.

 

산은 나를 부른다.

산은 우리를 부른다.

 

내 짐작이, 내 오래된 기억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 이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하려뇨.~~~

 

 

그런데 7,80년대 이런 자료가 있었어니.

체육 교육자료 총서 45. 등산(문교부.1978)와 등산교재 "산이 부른다"(서울학생교육원, 고등학교 등산교재 1988, 1991년)

 

제목이 하필이면  산이 부른다 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이효상(1906-1989)의 흔적 또는 설악산 정상석의 영향일까.

아무래도 등산의 저자가 이효상 선생의 제자이거나, 설악산 정상석을 보고 감명 깊어서일 것이다.


 

이로써. 지금 산악인들은 상상도 못할, 그때 그시절 설악산 대청봉에 있던 정상석 중의 하나를 풀어보았습니다.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세상은 물론이고 산도 양파같으나 오늘은 자료가 이것뿐이니..

 

--------------------------------

 

 

 

1970년 4월호 표지. 많은 것을 설명한다.

1970년 1월부터, 특히 4월은 노산 이은상 선생의 막내동생 이신상이 월간 등산을 운영한다.

그는 영화잡지를 했다더니, 잡지를 20대 여자 등산가를 분칠해서 반쯤 영화잡지처럼 만든다.

 

 

그때는 '산사람', '산악회' 프로필을 올리는 게 유행이었다. 산악인도 많이 없고, 산악회도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이라 가능했다. 4월은  그 유명한 구조대장 변완철 선생님이시다.

오늘날 원로라는 분들은 그와 친분을 과시하는데,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거론하겠다.

 

그의 프로필 중에 일제시대인 1936년 인왕악우회 발기인이라는 게 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검증해 보아야 할 일이다. 

'악우'라는 말은 식민지 조선의 여느 산악인들이 구사하기 어려운 용어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1970년 4월 당시. 요산요수 정상석은 이렇게 좌우가 훼손되어 있다.

더 놀라지 마시라.

 

2015년 공단에서 대청봉 요산요수비를 철거할 때까지 변함이 없다.

그 이후로 그 어느 누구도 더이상 훼손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겠다. 놀랍지 않은가.

 

 

이런 걸 밝혀 내는 것에 그치면 재미가 없고, 그 이유를 추측해 본다.

나는 이렇게 본다.

1970년대까지는 설악산이 한가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는 사람들이 많이 붐비어, 이렇게 끌로 정상석을 훼손하려는 악동들의 돌 깨는 소리가 더이상 은밀하지 않았을까라는 게 내 짐작이다....

 

이상 설악산 대청봉에 있던 정상석 요산요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몰라도 전혀 문제 없는. 알면 술자리 안주꺼리는 되는^^ 그런 이야기 앞으로 계속 하겠습니다..~~

 

 

 

 

 

 

덧붙여)

다음 블로거. 산이 날 에워싸고 님이 1982년 10월 27일 산행 사진입니다.

요산요수 위에 쌓아놓았던 돌탑이 다 사라지고, 

그의 뒤에는 태극기가 있었습니다. 태극기도 한때의 추억이라 모셔옵니다.

 

 

이상 산이 높고 깊어, 이야기도 깊은 설악산 이야기였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