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등산용, 군용 반합을 항고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등산의 재구성|2020. 10. 20. 00:48


옛날 산악회 사진에서 부러운 건 - 그들에겐 고생이었겠지만 - 항고로 밥을 해 먹는 겁니다.



이렇게 말이죠.

생나무로 틀을 만들어 항고를 줄줄이 메달아 건 다음, 나무로 불을 때어 밥을 합니다.

연기가 살짝 드리우는게 뭐랄까 '추억'을 표현하는 영화의 한장면 같습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항고는 일본말입니다. 일본어의 특성상 쓰기는 반합(飯盒)으로 하고 읽기는 항고(はんごう) 라고 합니다. 반합의 '합'은 뚜껑있는 용기를 뜻합니다. 그래서 반합은 뚜껑있는 밥그릇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반합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인 듯 합니다. 야후재팬에서는 반합으로 검색하면, 전부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것들입니다. 그 이유는 반합(항고)이니 하는 것은 근대 일본이 유럽에서 건너온 근대적인 취사용구에 붙여 만든 신조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인들은 이 용기를 반합(飯盒)이라 쓰고 항고라고 불렀을까요? 더 정확한 질문은 왜 항고라고 부르고 반합이라고 썼을까요입니다. 이글은 한국 군대의 추억 뿐 아니라, 오래전 산악회의 추억이 담긴 이 용어에 대한 '재구성'입니다.


한국의 나무위키나 일본의 야후재팬, 야후위키에 가 보아도 반합 = 항고, 이 야전용 취사용구가 유럽에서 언제 태어나 일본에 언제 도입되었는가 등에 관한 이야기는 자세해도, 왜 '항고'라고 불렀는지 그 유래에 대한 의문이나 해설이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글은 인터넷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항고의 시작은 유럽의 군대입니다. 전쟁터에서 구할 땔깜이 나무였기에 이렇게 땅을 파고 생나무가지를 걸고 거기에다 일인용 밥솥을 주루루 걸게 되는거죠.


일본어로 특히 항고로 밥을 하는 경우를 '취찬爨'이라고 합니다.

찬찬히 보면 맨밑에 큰대(大)와 불화(火)가 있고, 그 위에 나무들(林)을 놓고 맨 위에는 밥그릇을 몇개 놓고 있네요.^^



참고로, 땔감의 변화는 취사용구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나무가 사라지니 요즘은 걸개가 필요없습니다. 지금 재미로 항고로 밥을 하는 사람들은 우측처럼 버너나 숯 위에 깔개를 깔고 합니다. 


땔감의 변화는 그래서 걸개가 있는 항고의 퇴조를 가져오고, 

손잡이가 있는 코펠 형식으로 대체됩니다. 코펠에는 걸개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요합니다.



돌아와서 2차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항고로 밥을 하고 있는 또다른 장면입니다.

항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뚜껑(盒)이 아니라 나무에 걸 고리라는 걸 이제 아셔야 합니다.


나무위키에 가보면 항고의 유래는 독일어 Kochgeschirr라고 하고 있습니다. 

Kochgeschirr는 Koch(취사)와 geschirr (식기, 도구)로 나누는데요. 



말하자면 취사용 도구(Cookware)라는 일반명사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20세기 군대 1인용 취사도구라는 뜻도 함께 합니다. 이 유럽의 군대식 1인용 취사도구 Kochgeschirr가 일본으로 넘어오면서 일본의 근대학자들은 어떻게 번역해야 했을까요?


유럽제 취사용구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으로 넘어오면서 걸개는 살아남고 들개는 사라집니다.'뚜껑'이 있는 밥그릇이 아니라 '걸개'가 있는 밥그릇이 주된 번역포인트입니다. 



여기서 일본 전통가옥에서 보온 및 취사의 방식인 이로리(囲炉裏)를 보겠습니다.

방가운데에 바닥을 낮추어 장작을 놓고 불을 피우는데요. 천장에서 내려온 걸개에 주전자나 냄비를 걸어 물이나 찌게를 끓이게 되죠. 천장에서 내려오는 걸이를 지자이카기(自在鈎(ぎ))라고 합니다.

카기()라는 뜻은 갈고리, 걸이라는 뜻이죠.


부악백경 중의 한 장면입니다. 후지산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주인 옆에 하녀가 똑같은 방식으로 사케를 뎊이고 있습니다. 일본은 이런 식의 요리방식이 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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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일본이 근대문명을 번역할때 사용하던 하나의 기법을 소개해 봅니다.

'낭만'은 근대 일본이 프랑스어 roman(로망, 영어로는 romance 로맨스)를 번역한 조어입니다.

낭만은 浪漫를 한국식으로 읽는 것일 뿐이고, 일본사람들은 浪漫를 로망이라 읽습니다.

원래 프랑스어 발음을 살리면서 한자의 뜻과 음을 함께 살펴서 번역한거죠.

이런 예가 클럽(Club)의 번역어인 구락부(俱樂部)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구락부는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모임'이라는 뜻으로 Club의 일본식 발음 '쿠라부'에 정확히 조응합니다. 


발음도 원어에 가깝게, 표기도 원어의 뜻에 가깝게 하는게 하나의 번역방식이죠.

항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1인용 취사용구의 특징은 뚜껑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에 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것은 걸개 있는 취사용구라는 게 핵심입니다.


그들은 현명하게도 '걸이, 걸개'를 포인트로 번역했습니다.

전통적인 카기(鈎(ぎ)) 대신에 새로운 맛이 베어나는 신조어를 고민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선택했습니다. 외국어를 말이죠.

무언가에 건다는 뜻이 다들 알다시피 영어로 행거(Hanger)입니다. 독일어로는 Aufhänger이네요 


영어 Hanger의 영국식 발은 행거,  독일어 Aufhänger 의 발음도 아우프행어쯤 되네요. 둘다 일본식 발음으론 '항가'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항가'를 일본식 한자음으로 표기하면  항고'飯盒'가 되는거죠. 뜻도 덥개가 있는 취사용구라서 탁월한 조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아직은 저의 가설일 뿐이고요.


이렇게 해서 항고(飯盒)라는 발음과 단어가 일본에서 태어나고 식민지 조선에 도입됩니다. 

해방후 한국에서는 왜색발음을 척결하려는 이들은 은근히 한국식 발음인 반합이라고 부르고, 추억을 간직하려는 일단은 항고를 고집하는 거죠. 항고건 반합이건 한국말이 아닌건 마찬가지이고요.


그런데 지금 이 아이디어는 '무(無)'에서 생겨난 게 아닙니다. "나의 대학 산악부시절을 생각한다"라고 서울 문리대산악회 59학번 서재만 선생이 쓴 글이 있습니다. 지금 검색해보니 사라졌네요. 10년도 훨씬 전, 1960년대 대학산악부에 관한 팩트가 많이 있어 프린트 해 놓은 걸 까마득히 있고 있다가. 책장사이에서 툭 튀어나와 다시한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번에 읽었더니 예전엔 미처 몰랐던 부분에 눈길이 갔습니다. 그 부분은 이렇습니다.


여럿이 야영을 할 때에는 그나마 수량이 부족하여 찌게나 국은 버너로 끓이고 밥은 주로 행거(Hanger)로 할 때가 많았다. 자주 취사를 하다보니, 이력이 나서 숟가락으로 행거의 뚜껑을 두드려만 보고서도 진 밥과 된 밥을 가려 낼 만큼 익숙해 있었다.


어랏! 이 행거라는 게 항고를 말하는 것 같은데, 왜 행거라고 했을까? 혹시 미군용품이 등산장비였던 시절 미군들이 행거라고 부른 것일 수도 있겠고, 일본어 '항고'를 꺼려서 비슷한 발음의 행거라고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혹시 항고의 어원이 Hanger처럼 '걸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들었다.







오늘날 등산계에서는 항고는 사라졌습니다. 땔깜이 나무가 아니라 휘발류나 가스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무를 때서 불을 지펴야 하기는 '전시'상황을 가정하는 군대에서는  아직도 사용하고 있겠죠. 이상, 일본인들도 궁금해 하지 않는듯한(?) 항고이야기를 한번 해보았습니다. 한국에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등산박물관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없습니다.^^ 유럽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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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일본어 발음은 한국식 한자음 '반'을 '한'으로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반대(反對)는 한타이라고 하죠. 또  예를 들어 합계(合計)를 고케이라 하듯 합을 고로읽는 경 많습니다. 그래서 반합이라 쓰고, 항고라고 읽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로리, 지자이카기 http://blog.daum.net/costmgr/6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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