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면암 유만석씨가 풀어내는 설악산 이야기입니다...
196,70년대 설악산 가이드 전성시대가 있었습니다. 가이드들의 구라로 설악산 전설이 만들어지고 유포되었습니다. 그때를 대표하는 이가 이대성씨와 유만석씨입니다.
이대성씨는 서울대 치대 산악회 OB인 이병태 박사가 "깍두리로 통하는 나"와 "깍두기의 설악산 식사당번"에서 자세하게 풀어냈고요. 오늘은 유만석씨를 소개할까 합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80년부터 야심차게 펴낸 "한국구비문학대계" 입니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우리 삶의 기본으로 정착되기 전 1980년대 채록된 경향각지의 설화, 민요 등등의 모음집입니다.
이 책을 알게 된건 어느 지면에서 소설가 황석영이 제일 좋아하는 책이 이 책이라 해서 관심을 가졌죠. 산과 관련된 산골은 그러나 별로 없는 듯 합니다. 1-1 서울시 도봉구편이 그나마 산에 가깝죠. 우이동이 지금은 강북구이지만 저시절에는 도봉구여서 우이동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쉬운 건, 고양시에도 구술작업을 하긴 했지만, 북한산성쪽 사람들, 그러니까 산성동 사람들은 대상으로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 책들은 '구전 설화'가 중심이라서 '산'과 직접적인 관련은 별로 없습니다.
오늘은 1983년 나온 강원도 속초시와 양양군편에서 속초의 설악동 이야기입니다. 구술자는 귀면암에 토굴을 짓고 관광안내업을 하던 유만석씨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역시 '설화', '이야기'에 방점이 찍혀서 설악동이 어떠했는지, 주민들과 등산객들이 어떻게 어울렸는지는 들어 있지 않아 아쉽습니다.
생전의 유만석씨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는 이 채록작업을 하고 3년뒤, 계곡에서 등산객을 구조하려다 그만 물에 휩싸여 유명을 달리 합니다. 유만석씨에 대해 더 궁금하시다면, 다음에서 등산박물관을 검색해서 검색란에 유만석을 넣으면 됩니다.
유만석씨에 대한 소개입니다. 1981년 당시 설악동에 들어온지 22년이라 하니, 1960년경이 되겠네요. 막 설악산이 관광지화되던 그 순간입니다.
이 글이 '팩트'로서 작용하는 대표적인 것이 '여러분이 와서 와선대요, 비가 와서 비선대'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흔히 이 입담의 주인공이 유만석씨라고 나돌고 있는데요. 이 글에 의하면 고(?)복수씨라는 분이 만든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설악산에 대한 설화를 그는 장장 70여페이지에 풀어내고 있는데, 대부분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따라서 여기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설화나, 당시 설악동을 보여주는 몇몇 장면만 모셔오겠습니다. 주욱 보시다가 관심있는 제목이 나오면 유심히 보시면 좋겠습니다.
1981년 봄에 조사를 했네요.
장정룡 교수는 태어난 곳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설악동입니다. 그러다가 재개발하면서 이사를 갑니다.
"설악동은 관광촌으로 지정되어 있다. 약 200여 가구에 인구 1200여명으로 직업은 대개 관광기념품을 팔거나 서비서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조사는 원래 설악동(지금의 매표소 있는 곳)이 아니라 이전한 다음에 작성한 것입니다. 1970년대 후반, 청와대가 앞장서서 이 이전작업을 진행했죠. 그런데 안타깝게 당시 설악동의 배치도나 실태조사같은 보고서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책의 주제와 조금 달라지는데, 설악동 주민들과의 구술조사를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구 설악동 관광업 종사자들의 구술조사작업이나 민속조사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대표 관광지, 산행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심마니 어의 일부입니다. 집을 모둠, 쌀을 모래, 개를 마당너구리. 곰을 너태마니라고 했네요. 입쌀을 왕모래.. 모래가 무슨 뜻일까요? 담뱃대를 꼽쟁이. 낫을 감재비. 물을 모래기름. 돌무덤을 찌게 모둠, 성냥을 당황, 수깔을 올림대. 사람을 마니 여자를 개장마니 라 하는 등 재미있습니다. 다른 건 이해한다 하더라도 사람을 마니, 여자를 개장마니라 한 건 어떤 유래일까요?
유만석씨는 설악산 10동지 사건에서 한국일보 기자를 이끌고 현장으로 간 인물이기도 합니다.
1960년 설악에 들어와 10년쯤 지나니 설악산 골골이 훤했을 겁니다.
장정룡교수는 설악동에 살았기 때문에 그시절에 이미 유만석씨 얼굴을 알게 됩니다.
"작달만한 체구에 빠른 말쏨씨로 이야기를 잘 이어나갔다. 이야기 하는데도 전혀 수툴지가 않았고..."
귀면암은 예전에는 겉문달이라고 불렸고, 한때는 안문달이라고 불렸는데, 안에 있다. 겉에 있다 그래서...그런거에요.
꾸며낸 엉터리 이야기. 고복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이 이가인지 그래요. 그사람이 꾸며낸 이야기인데...
와선대는 왔다고 해서 와선대이고, 비선대는 비가 와서 비선대라고 한다.. 달려간다 달마바위 울고 앉았다 울산바위 등등 말장난으로 만든 유래 이야기가 상당히 인기를 끌었습니다.
박인식씨가 중앙일보 "설악에 살다"에서 유만석씨가 이 말을 만들어냈다고 하고 있지만, 뉴스 사실은 성이 이가인 고복수 가이드님이 만들어낸 걸로 보입니다.(*그런데 이 개그는 이대성씨가 만들었다고 하는 설도 있어서 정확한 것은 더 알아보아야 할 듯 합니다.)
설악산의 설에 대한 이 어원은 최남선씨 또는 이은상씨의 작품이죠. 제 기억에는 최남선인 것 같습니다. 설을 설날 등의 설로 풀어내는 거 말이죠.
"주"에는 "함지덕이, 현재는 함지데기라고 쓴다. 등산코스로 설악산 - 소토왕성-함지데기-화채봉-동북능선-대청봉 코스가 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덕'은 북한의 산에 자주 있는 표현인데, '산'이라는 뜻이죠. 유만석씨는 피나무로 만든 그릇을 함지덕이라고 하고 있는데, 아마 같다붙인 말장난으로 보입니다.
설악산 우단골이라는 지명도 처음 들어봅니다. 네이버에 검색해 보니 '우골'은 나오는데 우단골은 나오지 않네요. 설악산 지도에도 없고요. 짐작으로 '윗+안골'의 뜻으로 우단골인 듯 합니다.
양폭과 음폭에 관한 일화입니다.
양폭, 음폭이
음폭의 유래에 대해서 유만석씨는 "바위절벽위가 여자의 그것처럼 생겨서 음폭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가요?
심마니나 약초꾼들이 붙인 이름일텐데, 염주폭포가 있는 염주골을 안내피라고 한다네요.
장정룡 교수는 죽음의 골짜기도 안내피라고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염주골이 안내피, 죽음의 골짜기를 바깥내피(?)가 될까요. 약간의 혼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채봉 운주암도 제가 처음 듣는 지명터 또는 절터입니다. 절터일 수도 있겠고, 또는 바위 이름일 수도 있겠습니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천막을 안가져 간 사람들이 피신을 하고 그러는 운주암이 있어요.
거게는 아주 샘터도 좋고해서 ....
운주암터를 화채봉 정상 근처의 샘물이 있는 곳을 말할까요? 암자가 있었을 수도 있겠고, 그냥 비를 피하기 좋은 바위일 수도 있겠습니다. 안가보아서 뭐라 말을 못하겠는데요^^
개방우리.. 개방울을 뜻하는거겠죠.
방울이 딸랑딸랑 소리가 나면 호랑이도 쇳소리를 싫어해서 도망간다니... 한때 방울을 달고 다녔는데, 이렇게 뱀이 아니라 호랑이나 곰 멧돼지를 쫓는 효과도 있었겠습니다...
이 글에서 운주암. 우단골. 안내피 등은 처음 듣는 지명들이라 설악산 매니아들을 위해 다소 소득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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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고 이병태 박사의 수필집 "깍두기로 통하는 나" 이 책은 1960년대 나온 책이라 구하기 어렵고,
이 에세이집 중에 설악산 관련 부분은 따로 떼어 내고 산행글을 덧붙여 낸 책이 "깍두기의 설악산 식사당번"이 나옵니다.
깍두기라는 뜻은. 하도 가난해서 깍두기를 반찬으로 많이 싸가서 붙여진 별명이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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