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백운대, 변완철 선생을 찾아서.
변완철 선생에 대해 내가 어찌 알랴만, 두가지는 기록해 놓아야겠다.
연간 400만명이 찾는 북한산 백운대와 관련하여 소소한 그러나 알면 고마울 이야기가 되겠다.
"악돌이"의 박영래 기자는 1984년 4월호 "평생 산악구조대장 잠들다"라는 추모기사에서
"그는 조난과 구조에만 앞장 선 것이 아니라 산악사고 방지를 위한 일에도 앞장서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백운대 오름길의 쇠줄인데, 이것은 그가 1947년 당국에 애걸하다시피해서 쇠줄을 받아 손수 매놓은 것이다. 그 후 6.25가 나기 전 인수 후면과 우이암엔 하강용 피톤을 직접 박아놓기도 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인수봉과 우이암 그리고 1966년 성북경찰서의 지원을 받아 만장봉에 하강용 피톤을 박은 건 그래도 알려져 있다. 오늘은 '백운대' 쇠줄에 관한 이야기가 되겠다. 연간 400만명이나 찾는다는 북한산 백운대를 오르는 이들 중 누군가에게는 그의 이름이 기억되면 좋겠다.
위문 지나 백운대에 놓여진 쇠철심과 쇠줄 그리고 돌계단은 1927년 경성의 유지들이 기금을 모아 만들어졌다. 북한산 등산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국립공원 공단에서는 이런 인공시설물을 설치하고 있다.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백제의 온조가 부아악을 오른 이후 북한산 2000년 역사 중 가장 주목할 해이다. '누구나' 북한산 백운대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백운대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움과 그속에서 싹트는 '미의식'을 모르고 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나는 이게 '민주와 평등'의 이름으로 축하할 일이라고 본다.
1937년 서울의 전철을 운영하는 경성전기에서 발행한 "북한산"에서 백운대라는 이름의 사진이다.
백운대를 한번만이라도 올라본 이라면 이곳이 어디인지 알것이다. 첫 쇠줄을 잡고 오른 후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곳이 아닐까.
아마도 백운대에 오른 이들은 모두가 '아파트'가 사라진 풍경을 상상해 볼 것이다.
저들이 부럽다. 너른 마들평야엔 민가가 여기저기, 중랑천만 '한가로이' 흘러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상의 쇠난간. 이건 오름용이 아니라 안전용으로 설치한 것이다.
이곳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며 동서남북을 돌아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은 산세를 따라 보기도 하고, 한강이 흘러 서해로 들어가는 것을 유연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상은 변했다.
중일전쟁을 획책하고 이어 태평양전쟁으로 일제는 휘몰면서 삶은 급박해졌다.
*필자소장
백운대기념이라고 한 이 사진에는 지카다비를 신고 각반을 찬 젊은이가 있다. 2603년 쇼와 18년은 1943년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은 역전의 계기를 만들어 점점 옥죄어오고 있다. 이 불쌍한 친구는 곧 전쟁의 소용돌이로 휩싸여 들어 갔을 것이다.
바위에는 곳곳에 등산기념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왼쪽에는 1943년 4월 18일 이태원ㅁㅁ 등산기념의 글자가 페인트로 그려져 있다. 저기뿐 아니라 뜀바위 근처 여기저기 곳곳에 다 페인트칠을 했다. 아마 백운대 정상에는 페인트공이 상주(또는 주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진 뒤 정상부를 보면 철심만 있고 쇠줄이 없는 걸 볼 수 있다. 어디로 갔을까? 호승심을 가진 이가 끊어서 버렸을 수도 있겠고, 전쟁물자로 공출했을 수도 있겠다. 그때는 그러고도 남을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변완철이 등장한다.
*월간 산 초기.
변완철의 소개는 인터넷 검색하면 '만년구조대장', "뺑코'등으로 나온다. 그러나 아무래도 변완철 김정태 양두철 등에게 '악돌이'라는 별명을 선사받을만큼 사랑을 받은 박영래의 이 추모기사만한 '애정'과 절절한 '존경'과 산악계 풍토에 대한 '비판'은 없을 것이다.
*1970년 월간 산 소개글에서
등산을 신앙으로 알고 신앙처럼 등산한다는 변완철은 박영래에 의하면 1918년 11월 8일 서대문 충정로에서 태어나 1935년부터 북한산을 올랐다고 한다. 한국산악회 회원번호는 1번 송석하, 2번 홍종인에 이어 27번이었다고 한다.
협성공업학교를 나와 경성의 공무원으로 있다가 해방후에도 종로구청 수도과 호적과 등에 근무하다 516이 터지면서 본격적으로 산에 입산했다 한다. 직접 구조한 조난자만 해도 1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백운대 오름길의 쇠줄인데, 이것은 그가 1947년 당국에 애걸하다시피해서 쇠줄을 받아 손수 매놓은 것이다." 해방 후에도 백운대를 찾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눈에는 그때부터 백운대 등산하는 이들의 '안전'이 절실했나 보다. 아마 그때만 해도 종로구청 기술직 공무원이었으니 이게 가능했을 것이다.
허나, 당시 남한에 쇠줄뽑는 공장이 있었으려나. 패전 전 일제가 남긴 거와 미군이 갖고 들어온 것이 전부였고 필요한 곳이 많았을 것이다. "애걸하다시피"라는 말의 울림은 그래서 가볍지 않다.
위의 1943년 사진에는 사라진 정상부문의 쇠줄은 이때 그가 새로 했음에 틀림 없다.
그냥 한줄 글로만 읽으면 감동이 없는데, 사진을 보면 달라진다.
이제 우리는 백운대에서 '안전'하게 세상을 둘러 볼 수 있게 되었다. 북한산을 오른 이들이 가슴에 뭔가 충만한게 생겼거나, 삶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씻을 수 있게 된 것은 모두다 그의 음덕이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사진.
1950년 6월 18일 백운대 사진이다. 위문에서 올라가 곧바로 있는 부분이다. 흰옷을 입은 걸 보면 영락없는 백의민족이다. 쇠줄을 잡고 백운대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박영래는 '백운대 오름길'의 쇠줄이라고 하고 있다. 물론 글자 그대로 등산로 중의 쇠줄일 수도 있겠다만, 나는 그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사진자료가 앞으로 발견되면 좋을텐데, 지금 사진에서처럼 오름길의 쇠줄은 그대로였지 않을까 싶다.
사진을 오래보면 좀 우울해진다. 이로부터 7일 뒤에 6.25 전쟁이 터지기 때문이다. 1945년 태평양 전쟁때는 소년이라 징병을 피했을 이들은 이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조선인으로 치자면 태평양 전쟁 때와는 비할 바 없는 순도100퍼센트의 '고통과 비극'의 한복판으로 말이다.
이상 변완철 선생의 은공을 이야기하는데, 글이 이상하게 흘러가버렸네.
하필이면 사진이 전쟁 일주일 전의 것이라서일 것이다.
글은 이렇게 써도 읽기는 제대로 읽어 주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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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북한산 백운대에 관해서,
두번째는 1980년대 한국산악회 후배들은 그들을 어떻게 대접했는가이다.
두번째 글은 모래내 금강의 김수길, 백령회의 김정태와 함께 이야기를 해야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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