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등산가 임무의 사진 한장으로 가는 금강산 이야기

등산의 재구성|2019. 12. 19. 17:00

 

'북한산 인수봉을 누가 처음 올랐나'를 규명할 때 영국인 아처, 일본인 이이야마와 함께 항상 등장하는 이름으로 임무가 있습니다. '인수봉 초등'이라는 주제는 제 관심과 능력 밖의 이야기이고요.

 

오늘은 그가 1929년 금강산 비로봉을 동계 초등하려고 시도할 때의 사진 한장으로 그당시 금강산 '등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의 대강을 해볼까 합니다.

 

남북 분단후 금강산 말고, 만약에 일제 시절에 태어나고 시절운(?)이 좋았다면 분명 찾았을 금강산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말이죠. 금강산에 대한 과잉의 의미부여와 달리 이런 내용은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하오니 다소 기대에 미흡하더라도 양해하시압.

 

                                                    

 이 사진출처는  다음 카페 한국산서회(조장빈 회원의 글)이고, 임무와 동계 금강산 비로봉 초등에 관한 이야기는 카페에 들어가셔서 글을 참고하시면 좋겠다. 일제 시대 금강산에 대한 전문 산악계의 관심은 동계 금강산 등반과 집선봉 암벽등반인데, 조장빈의 이번 글은 그 중 전자에 주목했다.

 

각설하고, 글에 의하면 이 사진은  "임무의 1929년 첫 동계 비로봉 등반 당시"라고 한다. 임무에 관해 관심 있는 이라면 이 사진이 눈에 익을 텐데, 나 역시 이제까지 우측 두사람의 등산가에만 주목했다.

 

오늘은 문득 좌측의 두사람이 관심을 끈다. 등산복이 아니라 일상복을 입고 있는 남자와 그 앞 일본옷을 입은 소녀 말이다.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이곳은 과연 어디일까?

 

1)금강산 비로봉 정상일까 아니면 그 밑의 구메산장일까

 

금강산은 침봉으로 이어져 있지만, 비로봉 정상은 의외로 밋밋하다. 저렇게 생긴 바위는 없다. 그렇다면 그 밑에 있던 구메산장일까?

 

일제시대 금강산 비로봉 바로 밑에 이렇게 번듯한 산장이 있었다.  우리는 지리산이고 설악산이고 산장을 군대 막사같은 대피소 개념으로만 알고 있다. 일본의 산장은 식사와 술을 제공하고 간단히 씻을 수도 있다.

 

금강산 정상에 산장이 있었다는 걸 우리는 왜 모를까. 그 이유는 별게 아니다.  "금강산유기"의 춘원 이광수가 찾았을 때는 이 산장이 없었고, 고등학교때 배운 정비석의 "산정무한"에는 이 산장을 거론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비석은 정상에 있던 찻집에서 차한잔 하고 시간에 쫓기어 산장을 지나쳐 내려가 용마석 산장에서 하룻밤을 청했다.

 

구메산장이라는 이름의 이 산장은 대피소가 아니니만큼 경성에서 제일 유명한 야마모토(山本)여관이 위탁운영했다. 시즌에는 경성에서 예약을 해야할 정도로 붐비었다. 구메산장은 한겨울에는 찾는 사람이 없어서 휴업을 했다. 그리고 이 산장은 1932년 오픈했기에, 임무와 일행이 동계 비로봉을 시도할때는 없었다. 

 

 

 

금강산 구메산장에 관해서는 다음에서 '금강산 구메산장'으로 검색하면 등산박물관의 글들이 한 10개 있다.

 

금강산 곳곳에 있던 '산장' 역시 겨울은 휴업을 했기 쉽다. 따라서 그들이 찍은 이곳은 내금강 또는 외금강 입구의 '여관'이기 쉽겠다.

 

 

그들 뒤에 서있는 바위가 그냥 바위가 아니라 그 밑에 한 일(一)자로 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여관의 출입구 쯤에 있는 바위가 아닐까 싶다. 신발들이 깨끗하고 단정한 걸 보면 아침 어느 여관에서 출발할 때 찍은 사진일 것이다.

 

일찍부터 내금강에는 총독부가 운영하는 호텔이 있었다. 그 처음에는 내금강 장안사 안의 전각을 빌려서 운영했다. 장안사는 조선 시대때부터  양반네들이 오면 묵을 그들만의 넓직한 전용 건물이 있었다. 아마 그 건물이지 싶다.

 

1930년 전후엔 내금강과 외금강 온정리 역시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과 한국인이 운영하는 여관들이 제법 있었다. 일본식 여관은 조선식 여관보다 상당히 비쌌지만, 임무와 일본인 일행들은 당연히 일본인 여관에서 묵었을 것이다. 조선인들도 돈이 있으면 일본식 여관을 이용했다. 서비스, 청결 그리고 음식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다.

 

 

일본 기모노를 입은 소녀는 일본여관 주인집 딸이었을 것이다.  금강산 아래 고성에서 여관집 딸을 하다가 패전으로 쫓겨간 소녀의 회상에 의하면, 일본으로 돌아갔을 때 일본인들이 일을 하는 걸 보고 놀랐다고 한다.

 

뒤의 남자가 요주의 인물인데, 가이더도 아니고 포터도 아닌 건 확실하다. 그들은 이런 사진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구두를 신었고, 회중시계를 차고 있다.

 

 

 

 

 

 

애초에 회중시계가 들어간 주머니의 위치가 이상하였다. 한복을 잘 몰라서인데, 한복에 가슴주머니가 있는가 싶어서이다. 찾아보니 역시나였다. 한복조끼는 개회기때 등장한 신문물이었던 것이다. "조끼는 양복의 베스트(Vest 조끼)가 도입되면서 전통 옷감으로 만들어 저고리 위에 입은", 말하자면 양복 조끼의 패러디라는 거다. 전통한옷인 저고리나 배자에는 주머니가 없다. 아마 두루마기에도 없을 것이다.

 

임무가 소녀와 함께 줄을 서 있는 거 보면, 한복입은 남자는 임무와 일면식이 있는 남자나 새로 사귄 손님도 아니다. 애매한 위치에 서 있는 걸 보면 여관집 주인이 아닐까 짐작한다.

 

일제시대 금강산의 신문화는 이렇다.

 

금강산에는 내금강이고 외금강 온정리이고 시즌에는 밤새도록 불야성을 이루었다. 경성보다 낫다고도 할 정도였다.  고급 술집도 많았고, 일급 요정도 많았고, 게이샤와 기생들도 상주하고 있었다. 돈만 있으면 밤새도록 전전하며 술마시고 놀았다. 

 

이뿐 아니다. 미술사학자인 우현 고유섭의 금강산행기에 의하면 내장산 마하연 근처 어떤 산장에는 술시중을 들 여자들이 있었고, 매춘도 가능했다. 유홍준 교수가 애틋하게 '상상'하는 만물상의 산장 만상정에는 야외 목욕탕이 있어서 옷을 벗고 금강산을 보면서 여관집 여자가 몸을 씻어주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유홍준 교수 역시 실상을 알지 못한다.알았더라면 일본인의 추악한 행태에 분노했을 것이다. 금강산을 통일의 상징 또는 지렛대로 생각하는 남한의 시민들 대부분 역시 금강산에 관한 한 차마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철심 하나에도 분노하게 되는데, 금강산 전체에 철판을 덮은 거나 마찬가지를 알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설악을 예찬할 때 흔히 등장하는 구절이 있다.

 

"금강산은 너무 드러나서 마치 길가에서 술파는 색시같이 아무나 손을 잡게 된 한탄스러움이 있음에 견주어 설악산은 절세의 미인이 골짜기 속에 있으되 고운 모습으로 물속의 고기를 놀라게 하는 듯이 있다."라는 구절을 알 것이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그때 그 시절 실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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